본문 바로가기

비평

신카이 마코토, 너의 이름은 어쩐지 영화관에서 많이 울어버렸다. 처음에는 너무나 명료하고 당연해보였던 것들이 시간이 지남에 따라 모호하고 흐릿해지는 일, 그래서 내가 싸우거나 맞서야 할 대상이 다름아닌 망각해가는 나 자신이 되는 일. 그 과정에서의 혼란과 자기분열적 욕구들. 동일본 대지진을 배경으로 만든 작품이라는 점, 그리고 최근에 세월호 1000일이었다는 점을 차치하고서라도 과거를 기억하는 일은 나에게 중요한 이슈라서 감정이입을 많이 한 탓이었을 것이다. 사실 망각은 얼마나 달콤한가. 특히 잊지 말아야 할 사건의 피해자가 죽은이일 경우에, 망각에의 필사적인 저항이 과연 누구에게 도움이 되는 것일지는 확신하기 어려운 반면 망각이 가져다줄 평온함-급작스럽게 흐르는 눈물로부터, 이유 모를 상실감으로부터의 벗어남-은 대단히 유혹적이다... 더보기
[드라마] 도망치는 건 부끄럽지만 도움이 된다(영어제목: I got married as a job) - 가사노동에 대한 유쾌한 사고실험 유쾌한 드라마였다. 고학력임에도 불안정고용과 위계적 조직문화로 소진되어 가기만 했던 미쿠리가 우연히 하게 된 하라마사의 가사대행에서 성취감을 느끼게 되고, 여차저차해서 입주형 전업가사대행이 되기 위해 외형만 부부의 모습을 갖추는 것은, 부유한 남자와 결혼하여 가정주부가 되는것을 ‘취집’이라며 비난하는 세태를 멋지게 뒤틀어낸 데가 있었다. 가정주부로 취업하는 게 뭐가 나빠, 가사노동도 시간과 노력뿐 아니라 숙련도와 전문성이 요청되는 엄연한 ‘노동’인데다가 상당한 경제적 가치를 지니는 것인데, 내추럴 본 공대생 하라마사가 계산기 두드려본 결과 급료를 주어가면서라도 이 고용계약 하는 편이 자기한테도 유익하달 정도인걸, 하고. 하지만 거기까지였다면 가사노동에 관한 반쪽짜리 통찰이었을 것이다. 작품 속의 미쿠리가.. 더보기
[드라마] 마더 - 어머니'들'의 이야기, 한 인간의 성장 스토리 상찬할 것이 많은 작품이었다. 리메이크임에도 원작을 넘어서는 연출, 정서경작가가 새로 쓴 대사의 힘, 배우들의 연기력까지. 다양한 어머니들을 등장시키면서 그들 중 평면적인 인물은 없었다. ‘혼자 밥 차려먹다 서글퍼져서 떠올리는’ 그런 엄마가 아닌(어느 작가는 지도생들이 이렇게 써오면 무조건 돌려보낸다고도 했다, 게으른 상상력을 탓하며), 저마다의 사정, 욕구, 개성을 지닌 존재로 어머니를 그렸다는 점에서 페미니즘적으로도 의미 있다 여겼다(이 지점에선 이혜영분 영신의 캐릭터가 돋보였다). 가정폭력, 아동학대, 미혼모 이슈도 녹여냈다. 그렇지만 이 작품이 좋았던 가장 큰 이유를 꼽자면 무엇보다, 성장 스토리라서였다. 스스로 누군가의 엄마가 될 일은 평생 없으리라 생각했던 수진이 혜나를 만나 엄마가 되기로 결.. 더보기
우리 선희 누구도 타인에게 가 닿지 못하는가, 아니, 사람들은 그러기를 원하기는 하는가. 선희를 표현하려고 동원된 말들은 그녀의 실체를 포착하지 못하고 어김없이 미끄러지기만 한다. 그녀가 왔다 간 자리에 남는 것은 여기저기 옮겨다니다가 얼기설기 뭉쳐져버린 언어뭉치뿐. 세 남자의 좋아한다는 말에는 상대를 이해하려는 관심이 포함되어 있지 않다. 타인을 안다고 생각하는 것은 얼마나 큰 오류인가. 우리가 사랑하는 것은 상대방이 아니라, 타인 위에 덧씌운, 내가 보고싶은 이미지이지 않은가. 더보기
그렇게 아버지가 된다 히로카즈 감독의 영화는 섣부르게 과장하지 않는다. 일상 속의 작고 사소한 계기에 사람의 마음은 비가역적으로 움직여버리고, 그 변화가 삶의 방향마저 바꾼다는 점. 그 소박한 진리를 충실히 담아낸 영화였다. 료헤이에게 아들은 더이상 나를 충족시켜줄 대상이 아니라, 내가 행복하게 해주고 그럼으로써 그로부터 사랑받고 싶은 존재가 되었다. 그 변화에 '아버지가 된다'는 이름이 붙었다. 비단 아버지만이 아니라 인격적 관계라는 것이 모두 그럴 것이다. 더보기
아무르 나는 이 영화가 병환과 죽음 앞에서 스러져가는 사랑의 보잘것없음을 그리려고 했다고도, 윤리까지 뛰어넘어 상대방을 죽일만큼 강력한 사랑에 대해 말하려고 했다고도 보지 않는다. 사랑은 두 사람 사이에 상대방과 결코 분리되어 있지 않으나 완벽하게 일체도 아닌, 특정한 심리적 거리를 형성한다. 혹은 그 상태가 사랑이다. 그렇기 때문에 한쪽이 고통받고 그로 인해 다른쪽에게 현실적인 부담이 생겼을 때, 두 사람은 이중의 고통을 겪는다. 상대방의 고통으로 인한 고통과 내가 겪는 고통. 영화가 묵묵히 담으려고 했던 것은 이 지점이 아닌가 한다. 질병에 대한, 죽음에 대한 영화라고 해도 좋을 이 작품에 감독이 붙인 제목이 Amour, '사랑'인 것은 그래서일 것이다. 더보기
클로저 사랑에 대한 가장 큰 냉소.진실과 사랑이 무관할 뿐 아니라 방해가 될 뿐이라면, 사랑하는 두 사람이 교환하고 공유했던 세계는 무엇이란 말인가. 섹스 이상의 사랑을 모르는 단순무식한 래리만이 유일하게 자신이 원하던 것을 얻었다. 사랑의 환상이 현실에 존재하는 것은, 환상에 불과한 그것을 양 당사자가 열렬히 원하고 그 결과 믿을 때이다. 그러나 간신히 지탱되는 위태로운 것이기에 어떤 순간이 찾아오면 쉽게 깨진다, 아프게. 더보기
나, 다니엘 블레이크 불황과 선택적 복지의 틈바구니에서 서류더미와 관공서의 절차, 규정 따위가 무정하고 건조하게 사람을 죽여내는 부조리를 짚어내면서도, 전형적인 피해자 상으로 인물들을 그려내지 않았다. 많은 사회비판/폭로형 영화가 비판과 폭로를 위해서 사회적 소수자를 다시금 타자화 희생자화하는 점을 경계한 것. 다니엘 블레이크는 자신의 존엄을 귀히 여기고 당당함을 잃지 않으며, 극한의 상황에서도 나눔의 가치를 실천하며, 세상의 곳곳에 숨어있는 아름다움이나 따뜻함을 놓치지 않고 느낄 줄 아는 사람이다. 이토록 강건하고 인간다운 자에게 품는 감정이 동정이나 연민일 수는 없다. 존경과 존엄에의 공명으로, 그의 마지막 말이 실현되는 사회를 열망한다. 2016. 12. 25. 더보기
리틀 포레스트 (한국판) 극중 혜원엄마(문소리 분)는 혜원(김태리 분)에게 남긴 편지에 적었다. “혜원이가 힘들 때마다 이 곳의 흙 냄새와 바람과 햇볕을 기억한다면 언제든 다시 털고 일어날 수 있을 거라는 걸 엄마는 믿어.” 편지에 정작 자신이 이해할 수 있는 말은 하나도 없었노라고 골을 냈던 혜원이지만, 영화 말미에 이르면 엄마가 무슨뜻이었는지 이제 조금은 알겠다고 시인하게 된다. 영화는 서울서는 채워지질 않던 허기가, 계절의 흐름에 따라 말끔히 마르고 촉촉하게 차오르는 모습을 담아냈다. 따뜻한 힐링 영화라는 찬사의 다른 한 편에선, 실제 농촌생활은 호락호락하지 않다는 코멘트도 자주 보였다. 그래서 이 영화를 농촌판타지라고도 했고 농촌뽕이라고도 했다. 고향이랄 것 없이 여기저기 살았으나 그 와중에도 시골살이는 해본 적 없는 나.. 더보기
[전시]역사를 몸으로 쓰다展 역사를 몸으로 쓰다展 (~2018.01.21) 국립현대미술관 과천관 “몸으로 써내려간 역사는 명시적이지 않다. 퍼포먼스로 역사적 사건을 ‘재상연reenacting’하는 것은 언어로 역사를 서술describing’하는 것과 다르다. 몸짓은 소통하는 언어활동 내에 있지만 문장으로 말해질 수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항상 언어활동 속에서 파악되지 않는다. 조르주 아감벤Giorgio Agamben의 용어대로라면 몸짓은 ‘목적 없는 수단’으로서, 언어적이면서 동시에 언어 너머 혹은 바깥에 있고, 특정 목적으로 결정화되지 않는 ‘잠재성’의 가치를 지닌 어떤 것이다. 언어로 역사 쓰기가 역사를 재현하거나 명증하려는 정확한 목적성에 있다면, 목적없는 수단으로서의 몸짓은 언어가 가둬놓은 틀을 뚫고 나와 언어가 기입된 역.. 더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