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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죄 많은 소녀(After My Death), 김의석 "내가 먼저 죽었어야 했어." 이 영화가 그려내는 10대 여성 집단의 역학을 압축적으로 드러내는 대사. 학교폭력의 피해자가 아닌 가해자가 자살한다는 의 역설적인 상황이 상처와 나약함은 폭력을 행사해서라도 감춰야 한다는 남성 호모소셜 집단의 규칙을 반영한다면, 는 여성 청소년이 또래 집단에서 권력을 갖기 위해선 자신이 무고한 희생양임을 증명해야 함을 보여준다. 최고 권력자가 일진이 아니라 예수인 곳에서, 자기파괴는 사회적 요청이고 가장 성숙한 인물이 그것을 실행으로 옮긴다. 2020.2.24. 더보기
어느 가족, 고레에다 히로카즈 제도권 바깥의 삶들이 한 집에 모여 의지하고 살아가는 모습을 그리면서도 마냥 따뜻하게만 낭만화하지 않았다. 도박에 빠진 부모의 차에 유기되어 있던 쇼타, 부모의 신체적 정서적 학대에 노출되어 있던 쥬리. 이들을 거두어 기르면서, 어른들은 나름의 기대를 품는다. “스스로 선택하는 편이 강하지 않을까요, 정이라든가 유대라든가” 하는 노부요의 말은 남편 오사무와의 관계에 대한 자신의 경험이기도 하지만, 아이들이 부디 그리 느꼈으면 하는 바람이기도 하다. 쥬리에게 사랑하니까 때린다는 말은 거짓말이라고, 사랑하면 이렇게 하는 것이라며 꽉 안아주는 데에서도 노부요의 그러한 염원이 전달되는 듯 싶다. 아이 낳지 못하는 여자의 모성 욕망으로는 환원될 수 없는, 너를 여기서 더 행복하게 해주고 싶다는 마음. 하지만 포옹.. 더보기
소공녀, 임고운 소확행 권하는 사회에 대한 현실 직시. 동화 소공녀(a little princess)의 세라는 다시금 많은 재산을 상속받게 되고 그간의 가난함은 그녀의 곧은 심성을 증명해줄 고난과 역경이 되지만, 영화 소공녀(microhabitat)의 미소는 가난에서 벗어날 전망조차 가지고 있지 않다. 그래서 매일의 위스키 한 잔, 담배 한 갑을 위해 월세 내기를 포기하고 친구 집을 전전하기로 한 비현실적일 정도로 꿋꿋한 성격은 바람 든 것, 민폐, 염치 없음이 될 뿐이다. 면전에서는 박한 말로 미소를 쫓아냈던 옛 친구들이 모여 그애 여전히 멋있게 살더라, 고 추억하는 사이, 영화는 핸드폰이 끊기고 머리가 백발이 된 채 빌딩숲 사이에 텐트를 치고 간신히 서식하고 있는 미소의 모습을 비춘다. 잠깐 들르는 정류장으로서의 소.. 더보기
벌새, 김보라 맞다. 청소년기란 이런 것이었다. 청춘이란 말에 덧씌워진 환상처럼 빛나지도, 동화 같은 노스텔지어가 어울리지도 않는, 불안하고 서늘했던 시간. 학창 시절을 회고하면 '소녀감성'보다는 세상에 대한 환멸감이 먼저 떠오른다는 감독의 말이 길게 남는다. 2019.09.05. 더보기
허스토리(herstory), 또 하나의 일본군 ‘위안부’ 영화 ​ 일본군 ‘위안부’를 소재로 한, 또 하나의 영화가 개봉했다. 위안부 영화로는 첫 상업적 흥행을 거둔 이, 제작진의 선한 의도와 갖은 노고에도 불구하고 위안부 피해자들의 고통을 전시했다는 비판을 받아서일까. 그 이후의 영화들에는 윤리적 재현에 대한 고민이 녹아들기 시작했다. , 로 올수록 과거보다 현재에 초점을 맞추더니, 이번에 는 ‘위안부’였던 시절에 대한 회상 씬이 아예 없어졌다는 점이 눈에 띈다. 영화를 보는 내내, 관객들은 오로지 당사자들의 음성을 통해서만 과거사실에 접속할 수 있다. 선명한 시각적 이미지 대신 목소리를 매체로 선택한 것은, ‘기억’의 정치성, 구성성, 모호성을 드러내기 위한 효과적인 장치이기도 하다. 또렷하고 명백한 증언이 미리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들을 귀가 있어야 비로소 말.. 더보기
이창동, 버닝(Burning) 낡았다. 엔딩 크레딧이 올라갈때 이 영화에 대한 나의 첫감상은 그러했다. 비단 젠더관에 그치는 평은 아니고, 15년쯤 전에는 전위적이었으나 이제는 식상해져버린 예술영화 같았달까. 플롯도 구도도, 좋게 말하면 클래식하고 실은 진부했다. 하루키의 83년도 소설을 옮겼으니 어쩌면 당연한 일일 수도 있으나. 이창동에게 기대했던 바에 미치지 못했던 것이 사실이다. 그런데도 며칠 간 계속 잔상이 따라다니는 걸 보면, 연출만은 대단했다고 인정하는 수밖에 없겠다. 대남방송이 항시 배경음악으로 깔리는 공간, 파주. 해질녘에 나와앉아 대마초 피우는 셋, 저마다의 표정. 가장 압권으로 꼽힐, 노을을 배경으로 그레잇헝거의 춤을 추는 해미. 종수가 조급하게 뛰어다니는 자욱히 안개낀 농촌길과 격렬하게 불타는 비닐하우스 이미지의 .. 더보기
신카이 마코토, 너의 이름은 어쩐지 영화관에서 많이 울어버렸다. 처음에는 너무나 명료하고 당연해보였던 것들이 시간이 지남에 따라 모호하고 흐릿해지는 일, 그래서 내가 싸우거나 맞서야 할 대상이 다름아닌 망각해가는 나 자신이 되는 일. 그 과정에서의 혼란과 자기분열적 욕구들. 동일본 대지진을 배경으로 만든 작품이라는 점, 그리고 최근에 세월호 1000일이었다는 점을 차치하고서라도 과거를 기억하는 일은 나에게 중요한 이슈라서 감정이입을 많이 한 탓이었을 것이다. 사실 망각은 얼마나 달콤한가. 특히 잊지 말아야 할 사건의 피해자가 죽은이일 경우에, 망각에의 필사적인 저항이 과연 누구에게 도움이 되는 것일지는 확신하기 어려운 반면 망각이 가져다줄 평온함-급작스럽게 흐르는 눈물로부터, 이유 모를 상실감으로부터의 벗어남-은 대단히 유혹적이다... 더보기
우리 선희 누구도 타인에게 가 닿지 못하는가, 아니, 사람들은 그러기를 원하기는 하는가. 선희를 표현하려고 동원된 말들은 그녀의 실체를 포착하지 못하고 어김없이 미끄러지기만 한다. 그녀가 왔다 간 자리에 남는 것은 여기저기 옮겨다니다가 얼기설기 뭉쳐져버린 언어뭉치뿐. 세 남자의 좋아한다는 말에는 상대를 이해하려는 관심이 포함되어 있지 않다. 타인을 안다고 생각하는 것은 얼마나 큰 오류인가. 우리가 사랑하는 것은 상대방이 아니라, 타인 위에 덧씌운, 내가 보고싶은 이미지이지 않은가. 더보기
그렇게 아버지가 된다 히로카즈 감독의 영화는 섣부르게 과장하지 않는다. 일상 속의 작고 사소한 계기에 사람의 마음은 비가역적으로 움직여버리고, 그 변화가 삶의 방향마저 바꾼다는 점. 그 소박한 진리를 충실히 담아낸 영화였다. 료헤이에게 아들은 더이상 나를 충족시켜줄 대상이 아니라, 내가 행복하게 해주고 그럼으로써 그로부터 사랑받고 싶은 존재가 되었다. 그 변화에 '아버지가 된다'는 이름이 붙었다. 비단 아버지만이 아니라 인격적 관계라는 것이 모두 그럴 것이다. 더보기
아무르 나는 이 영화가 병환과 죽음 앞에서 스러져가는 사랑의 보잘것없음을 그리려고 했다고도, 윤리까지 뛰어넘어 상대방을 죽일만큼 강력한 사랑에 대해 말하려고 했다고도 보지 않는다. 사랑은 두 사람 사이에 상대방과 결코 분리되어 있지 않으나 완벽하게 일체도 아닌, 특정한 심리적 거리를 형성한다. 혹은 그 상태가 사랑이다. 그렇기 때문에 한쪽이 고통받고 그로 인해 다른쪽에게 현실적인 부담이 생겼을 때, 두 사람은 이중의 고통을 겪는다. 상대방의 고통으로 인한 고통과 내가 겪는 고통. 영화가 묵묵히 담으려고 했던 것은 이 지점이 아닌가 한다. 질병에 대한, 죽음에 대한 영화라고 해도 좋을 이 작품에 감독이 붙인 제목이 Amour, '사랑'인 것은 그래서일 것이다. 더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