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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강, 유월 유월한강 그러나 희망은 병균 같았다 유채꽃 만발하던 뒤안길에는 빗발이 쓰러뜨린 풀잎, 풀잎들 몸 못 일으키고 얼얼한 것은 가슴만이 아니었다 발바닥만이 아니었다 밤새 앓아 정든 위장도 아니었다 무엇이 나를 걷게 했는가, 무엇이 내 발에 신을 신기고 등을 떠밀고 맥없이 엎어진 나를 일으켜 세웠는가 깨무는 혀끝을 감싸주었는가 비틀거리는 것은 햇빛이 아니었다, 아름다워라 산천, 빛나는 물살도 아니었다 무엇이 내 속에 앓고 있는가, 무엇이 끝끝내 떠나지 않는가 내 몸은 숙주이니, 병들 대로 병들면 떠나려는가 발을 멈추면 휘청거려도 내 발 대지에 묶어줄 너, 홀씨 흔들리는 꽃들 있었다 거기 피어 있었다 살아라, 살아서 살아 있음을 말하라 나는 귀를 막았지만 귀로 들리는 음성이 아니었다 귀로 막을 수 있는 노래가 아.. 더보기
한강, 서시 서시한강 어느 날 운명이 찾아와 나에게 말을 붙이고 내가 네 운명이란다, 그동안 내가 마음에 들었니, 라고 묻는다면 나는 조용히 그를 끌어안고 오래 있을 거야. 눈물을 흘리게 될지, 마음이 한없이 고요해져 이제는 아무것도 더 필요하지 않다고 느끼게 될지는 잘 모르겠어. 당신, 가끔 당신을 느낀 적 있었어, 라고 말하게 될까. 당신을 느끼지 못할 때에도 당신과 언제나 함께였다는 것을 알겠어, 라고. 아니, 말은 필요하지 않을 거야. 당신은 내가 말하지 않아도 모두 알고 있을 테니까. 내가 무엇을 사랑하고 무엇을 후회했는지 무엇을 돌이키려 헛되이 애쓰고 끝없이 집착했는지 매달리며 눈먼 걸인처럼 어루만지며 때로는 당신을 등지려고도 했는지 그러니까 당신이 어느 날 찾아와 마침내 얼굴을 보여줄 때 그 윤곽의 사이.. 더보기
이창동, 시 "사람들은 시에 대해 양가감정을 느낀다. "왜요, 시 쓰시게요?" 대견하지만 한심하다는 뉘앙스. 아름다움을 다루는 고상한 일이지만 그곳은 삶의 참혹한 실상과는 무관한 세계가 아닌가 하는 감정. 그리고 저 학생[주인공 미자]과 교사는 그런 통념에 착실히 부합한다. 아직까지 그녀에게 시를 배운다는 것은 거실에 그럴듯한 화분 하나 갖다놓는 일과 다르지 않다. 시 한 편 써오르는 숙제를 받고는 사과를 만져보고 나무 그늘에 앉아보지만 그것은 오로지 자기 삶을 들여다보지 않기 위해서 할 만한 일들이다. 손자가 집단 성폭행에 가담해 한 소녀를 죽게 만들었다는 사실을 다른 학부형들을 통해 알게 되는 자리에서도 아직은 그랬다. 충격적인 사실을 듣고 그녀는 그 자리를 피하고 꽃의 아름다움으로 숨어버렸으니까. 그러나 상황은.. 더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