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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평/영화

허스토리(herstory), 또 하나의 일본군 ‘위안부’ 영화



일본군 ‘위안부’를 소재로 한, 또 하나의 영화가 개봉했다. 위안부 영화로는 첫 상업적 흥행을 거둔 <귀향>이, 제작진의 선한 의도와 갖은 노고에도 불구하고 위안부 피해자들의 고통을 전시했다는 비판을 받아서일까. 그 이후의 영화들에는 윤리적 재현에 대한 고민이 녹아들기 시작했다. <눈길>, <아이캔스피크>로 올수록 과거보다 현재에 초점을 맞추더니, 이번에 <허스토리>는 ‘위안부’였던 시절에 대한 회상 씬이 아예 없어졌다는 점이 눈에 띈다. 영화를 보는 내내, 관객들은 오로지 당사자들의 음성을 통해서만 과거사실에 접속할 수 있다. 선명한 시각적 이미지 대신 목소리를 매체로 선택한 것은, ‘기억’의 정치성, 구성성, 모호성을 드러내기 위한 효과적인 장치이기도 하다. 또렷하고 명백한 증언이 미리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들을 귀가 있어야 비로소 말해지기 시작한다는 메시지를 전달하는 것이다.

그 외에도 <허스토리>는 여러 모로 선명한 가/피해 구도를 허무는 데에 노력을 기울인 작품이다. 처음에는 위안부였다가 나중에는 포주 노릇을 했던 여성이라든가, 종군위안부 할머니와 근로정신대 할머니 사이의 미묘한 신경전 같은 것들(“나는 그래도 위안부는 아니다~?” “아이구 잘나셨어요.”)을 충실히 담아낸다. 법정을 오가는 봉고차 안에서 할머니들이 기분좋게 일본군가를 함께 부르는 장면도 인상적이다. 이들은 한 목소리로 말하지 않는다, 지배담론에 대한 완결된 저항의식을 가지고 말하는 것도 아니다, 심지어 진실만을 말하지도 않는다. 는 것을 말하는 영화.

가해자 일본-피해자 한국의 대립각을 세우곤 하는 민족주의 담론에 대해서도, 피해자에 대한 비난이 일본뿐 아니라 한국 내부에서도 날아드는 상황을 조명함으로써 분명한 거리를 둔다. 하지만 배정길(김해숙분)이 일본사람이라는 이유로 후원회 사람의 손을 매정하게 뿌리치는 장면도 넣었다. “일본 사람이면 치가 떨린다”는 그녀는 그렇다면 민족주의자인가. ‘짓밟힌 순결한 소녀’ 서사에 대해서도 마찬가지. 자신을 꽃다웠던 열일곱살 그때로 돌려놓으라고 오열하는 그녀는 순결 이데올로기에 갇힌 존재인가. 정대협 비판과 소녀상 비판이 좌파 지식인의 필수 코스처럼 자리잡혀버린 지금, 민족주의, 순결성 서사뿐 아니라 그에 대한 비판도 피해자를 대상화시킬 위험성이 있음을 짚은 것은 시사하는 바가 많다. 듣는 작업에 정답은 없고, 끊임없이 성찰하고 경계하며 정진할 수 있을 따름이라는 것.

하지만 아쉬움도 남는다. 법정 영화들이 가지는 기존 문법대로, 피해당사자보다 조력자/변호인이 중심인물이 되었다는 점이다. 홀로코스트 연구자와 홀로코스트 디나이얼 사이의 법정싸움을 그린 <나는 부정한다>에서 느꼈던 불편함이기도 한데, 해당 영화에서는 상대방이 피해자 증언을 왜곡하고 모욕하는 데에 천부적이라는 이유로 그들을 법정에 세우길 거부하고 상대방의 논리 허점을 짚는 방식으로만 밀고나간다. 어렵사리 승리를 거둔 뒤 주인공 연구자가 기자회견장에서 “법정은 역사적 사실에 관해 논쟁하기에 적합한 장소가 아니라고 생각했어요. 하지만 유능한 변호인단과 함께라면 이야기가 달라지더군요.”라고 변호사들의 공을 치하하는 사이, 홀로코스트 피해당사자들은 초기에 법정에서 배제한다며 항의할 때 잠깐 나왔다가 승소 후 고맙다며 손 잡아주는 역할로 다시 한번 얼굴을 비출 뿐이다.

<허스토리>는 그 정도는 아니지만, 단연 문정숙(김희애분)이 주인공이라는 것은 부정할 수 없다. 위안부 문제를 다룬 작품 안에서 위안부 여성들이 다시금 주변부로, 조연으로 밀려나도 되는걸까. 이들의 삶의 언어가 법 언어의 문법 속으로 포섭되지 못하고 주변화되는 상황에서, 이러한 구도의 영화는 이들을 영화 속 재현에서조차 주변화한 것은 아닐까. 너무 많은 것을 바라는 박한 평가일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위안부에 대해서는 앞으로도 더 많은 이야기가 만들어져야 한다는 점이다.


2018.07.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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