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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평/영화

클로저 사랑에 대한 가장 큰 냉소.진실과 사랑이 무관할 뿐 아니라 방해가 될 뿐이라면, 사랑하는 두 사람이 교환하고 공유했던 세계는 무엇이란 말인가. 섹스 이상의 사랑을 모르는 단순무식한 래리만이 유일하게 자신이 원하던 것을 얻었다. 사랑의 환상이 현실에 존재하는 것은, 환상에 불과한 그것을 양 당사자가 열렬히 원하고 그 결과 믿을 때이다. 그러나 간신히 지탱되는 위태로운 것이기에 어떤 순간이 찾아오면 쉽게 깨진다, 아프게. 더보기
나, 다니엘 블레이크 불황과 선택적 복지의 틈바구니에서 서류더미와 관공서의 절차, 규정 따위가 무정하고 건조하게 사람을 죽여내는 부조리를 짚어내면서도, 전형적인 피해자 상으로 인물들을 그려내지 않았다. 많은 사회비판/폭로형 영화가 비판과 폭로를 위해서 사회적 소수자를 다시금 타자화 희생자화하는 점을 경계한 것. 다니엘 블레이크는 자신의 존엄을 귀히 여기고 당당함을 잃지 않으며, 극한의 상황에서도 나눔의 가치를 실천하며, 세상의 곳곳에 숨어있는 아름다움이나 따뜻함을 놓치지 않고 느낄 줄 아는 사람이다. 이토록 강건하고 인간다운 자에게 품는 감정이 동정이나 연민일 수는 없다. 존경과 존엄에의 공명으로, 그의 마지막 말이 실현되는 사회를 열망한다. 2016. 12. 25. 더보기
리틀 포레스트 (한국판) 극중 혜원엄마(문소리 분)는 혜원(김태리 분)에게 남긴 편지에 적었다. “혜원이가 힘들 때마다 이 곳의 흙 냄새와 바람과 햇볕을 기억한다면 언제든 다시 털고 일어날 수 있을 거라는 걸 엄마는 믿어.” 편지에 정작 자신이 이해할 수 있는 말은 하나도 없었노라고 골을 냈던 혜원이지만, 영화 말미에 이르면 엄마가 무슨뜻이었는지 이제 조금은 알겠다고 시인하게 된다. 영화는 서울서는 채워지질 않던 허기가, 계절의 흐름에 따라 말끔히 마르고 촉촉하게 차오르는 모습을 담아냈다. 따뜻한 힐링 영화라는 찬사의 다른 한 편에선, 실제 농촌생활은 호락호락하지 않다는 코멘트도 자주 보였다. 그래서 이 영화를 농촌판타지라고도 했고 농촌뽕이라고도 했다. 고향이랄 것 없이 여기저기 살았으나 그 와중에도 시골살이는 해본 적 없는 나.. 더보기
내 사랑(Maudie) 영화를 본 직후의 감상은 매우 혼란스럽다는 것이었다. 첫째로 에단호크가 주인공이거나 적어도 둘의 비중이 비슷할 줄 알았는데 샐리호킨스가 주인공이었기 때문이고, 둘째로 극중에서 모드가 삶을 일궈나가는 방식을 바라보는 시선은 분명 인상적인 데가 있음에도, 때리고 막말하고 부려먹는 남편이 그와중에 간간히 잘해줬다거나 아내가 죽기전에 후회했다는 이유로 그 모든걸 로맨스로 덮는건 지나치게 진부하고 전형적인 남성서사라서 한 영화 속 상반된 젠더감수성에 어리둥절해졌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원제목인 Maudie가 주인공 모드 루이스(Mode Lewis)의 애칭인 모디였다는 것을 알고나서 어느정도 편안해졌다(첨에는 Mau die가 내가 모르는 어느 외국어로 my love나 my dear쯤 되는 것인 줄 알았고, 그래서 직.. 더보기
이상일, 분노 분노라는 감정의 재생산 기제에 대한 지극히 사회적인 접근.이 영화는 통상적으로 죄책감, 우울, 자책 등으로 불릴 감정까지를 분노로 포괄하는, 광의의 개념으로 사용하였는데, 아버지에게 "아이코라서?"라고 되묻는 아이코의 얼굴은 그러한 감정들이 갈곳 잃은 분노의 여러 이름들임을 증명하는 듯했다. 자신을 누구보다 사랑하는 아버지조차-어쩌면 누구보다 사랑하기 때문에, 왜냐면 불신하여 모든 가능한 위험으로부터 보호하고싶은 것이 부모 마음일 수 있으니- '그런'일을 겪은 딸이 평범하게 행복해지리라고 믿지 못한다는 것. 사실은 자기자신도 그것을 확신하지 못한다는 것. 어떠한 표정도 띄우지 못한 텅 빈 얼굴과 보이지 않으나 느껴지는 그 이면의 넘실거림. 등장인물들 중 누구도 소위 '정상가족'의 테두리 안에 있지 않으며.. 더보기
메기스 플랜 보면서 홍상수감독의 북촌방향이 자주 떠올랐다. 존 역의 에단호크가 쓰레빠로 뺨 때리고싶은 먹물찌질남을 소름돋게 잘 소화해냈기 때문. 먹물찌질남과 엮인 두 여자가 까칠예민한 먹물여성과 헌신적이지만 (남주인공이)존경할만하지는 않은 여성이라는 것도 기존 영화들에서 자주 반복되었던 패턴이다. 그렇지만 북촌방향에서 여성들이 소재로 배치된 것에 비해, 매기스플랜은 여성인 매기를 주인공으로 내세웠을 뿐 아니라 존을 둘러싼 두 여자-매기와 조넷의 관계를 비중있게 다루고 있다. 남주인공의 연애담이 곧 그의 인생행로의 비유로 쓰이는 영화들에서, 남주인공과 관계맺는 여성들은 각각 세계의 한 영역을 상징한다는 측면에서 중요한존재들이며 때로는 숭상되기도 하지만, 그들은 고정된 기표이자 장소처럼 재현된다. 북촌방향의 성준(유준상.. 더보기
구교환, 꿈의 제인 인간은 무엇으로 사는가. 경계 바깥의 삶들에게는 허락되지 않는 안정된 기반, 세상에의 신뢰라든지 미래에의 전망 따위 것들은 그 위에서만 가능한 것이다. 말라붙어 가는 자신의 존재를 지키기 위해 영화 속 주인공 소현이 붙잡은 것은 이야기였다. 꿈 같은 이야기. 사실과는 다르지만 진실을 담고 있는 논/픽션. 그러나 나는 소현이 만든 꿈에 가슴이 시리었다. 스쳐지나갔을 뿐인 인연들을 중요한 등장인물로 배치시키고, 이야기의 서문과 결말을 모두 타인에게 들은 말로 채워낸 그 공허함이. 삶을 간신히 지탱하고 있는 환상 안에서조차 제인이 스스로 목숨을 끊어내는 깊이 모를 절망이. 아마도 유서였을 소현의 이야기가 누군가에게 들리게 되었다면. 이 서툰 아이는, 시신 유기한 장소를 다그침받는 상황에서조차 "니 이야기 말고.. 더보기
우리들 인사, 칭찬, 선물. 그리고 웃음. '네가 좋아, 우리 친해지자' 하는 이 투박한 손 내밀기에, 나이가 든 만큼 매끈해진 소셜스킬-그 원활하고 점잖은 상호작용 망 속에서 영위되던 내 일상에 파문이 일었다. 결핍에, 부러움에, 불안함에 휘청거리면서도, 상대방에 대한 호감과 사랑받고 싶단 마음을 숨기지 못하는 나이가 이토록 예뻤던가. 지나오기 전에는 미처 몰랐다.무엇보다 이 영화의 압권은 윤이의 "그럼 언제 놀아?"라는 명대사일 것이다. 옳고그름과 형평을 따지는 정의justice의 논리를 잠시 억압해두고 상대방이 나에게 가지는 주관적 의미를 생각할 때, 관계relationship가 시작된다는 것. 내가 성인이 되고도 좀처럼 깨닫지 못했던 이 명제를 세 단어로 압축해낸 촌철살인. 2017.5.5. 더보기
이창동, 시 "사람들은 시에 대해 양가감정을 느낀다. "왜요, 시 쓰시게요?" 대견하지만 한심하다는 뉘앙스. 아름다움을 다루는 고상한 일이지만 그곳은 삶의 참혹한 실상과는 무관한 세계가 아닌가 하는 감정. 그리고 저 학생[주인공 미자]과 교사는 그런 통념에 착실히 부합한다. 아직까지 그녀에게 시를 배운다는 것은 거실에 그럴듯한 화분 하나 갖다놓는 일과 다르지 않다. 시 한 편 써오르는 숙제를 받고는 사과를 만져보고 나무 그늘에 앉아보지만 그것은 오로지 자기 삶을 들여다보지 않기 위해서 할 만한 일들이다. 손자가 집단 성폭행에 가담해 한 소녀를 죽게 만들었다는 사실을 다른 학부형들을 통해 알게 되는 자리에서도 아직은 그랬다. 충격적인 사실을 듣고 그녀는 그 자리를 피하고 꽃의 아름다움으로 숨어버렸으니까. 그러나 상황은.. 더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