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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평/영화

이창동, 버닝(Burning)

낡았다. 엔딩 크레딧이 올라갈때 이 영화에 대한 나의 첫감상은 그러했다. 비단 젠더관에 그치는 평은 아니고, 15년쯤 전에는 전위적이었으나 이제는 식상해져버린 예술영화 같았달까. 플롯도 구도도, 좋게 말하면 클래식하고 실은 진부했다. 하루키의 83년도 소설을 옮겼으니 어쩌면 당연한 일일 수도 있으나. 이창동에게 기대했던 바에 미치지 못했던 것이 사실이다.
그런데도 며칠 간 계속 잔상이 따라다니는 걸 보면, 연출만은 대단했다고 인정하는 수밖에 없겠다. 대남방송이 항시 배경음악으로 깔리는 공간, 파주. 해질녘에 나와앉아 대마초 피우는 셋, 저마다의 표정. 가장 압권으로 꼽힐, 노을을 배경으로 그레잇헝거의 춤을 추는 해미. 종수가 조급하게 뛰어다니는 자욱히 안개낀 농촌길과 격렬하게 불타는 비닐하우스 이미지의 대비. 60대 이창동이 바라보는 한국의 젊음, 그 뿌옇고 묵직한 불안의 시각화라는 측면에서.


2018.05.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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