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각예술 웹진 SEMINAR
ISSUE 4.
http://www.zineseminar.com/wp/issue04/04-abortion/
낳아라, 우리가 원할 때 : 인구정책과 낙태죄의 창조
글. 은진
1. 여전히/더욱, 인구정책
이제 낙태죄에 관한 논의에서 인구정책은 빠지지 않고 언급되는 키워드가 되었다. 2016년 9월 보건복지부의 「의료관계 행정처분규칙 시행령」 개정안 입법예고를 도화선 삼아 전개된 낙태죄 폐지 운동은 임신중단을 직접 몸으로 겪어내는 여성의 경험과 입장을 조명했을 뿐 아니라, 낙태죄와 인구정책의 밀접한 관련성에 대한 비판의식도 적극적으로 표출했다. 정부가 산아제한의 필요성이 컸던 1960-1970년대에는 임신중단을 허용하고 공공연하게 권장하기까지 하다가, 저출산이 사회 문제가 되자 낙태죄 처벌을 정상화함으로써 출생률 제고를 꾀했다는 것이다. ‘임신중단 전면 합법화 시위 카페 BWAVE(Black Wave)’의 ‘아기 자판기 퍼포먼스’는 붉은색 자판기 모양 설치물에 “버튼을 누르면 아기가 나옵니다. 1. 인구정책 2. 피임 실수 3. 성범죄”라고 적음으로써, 인구정책에도 여성을 아기 낳는 기계로 폄훼하는 시선이 담겨있음을 지적했다. ‘모두를 위한 낙태죄 폐지 공동행동’의 집회에서는 초기 슬로건이었던 “My Body My Choice(내 몸 내 결정)” 대신 “낙태가 죄라면 범인은 국가다”, “정부는 제발 낄끼빠빠(낄 때 끼고 빠질 때 빠져라)”, “저출산 문제 답은 여성이 아닌 국가에게”와 같이 여성의 몸에 대한 국가의 통제에 저항하는 의미를 담은 구호들이 사용되었다. 낙태죄 폐지 반대 운동의 천주교·기독교계조차 낙태죄에 대한 정부의 비일관적인 태도는 부정적으로 언급하고 있다는 것은 낙태죄가 정부의 인구정책적 목적에 따라 좌우되는 동안 발생한 폐해가 많은 이들에게 알려졌다는 방증일 것이다.
뜨거운 열기의 낙태죄 논쟁을 통해 널리 알려지게 된 사실들에는 다음과 같은 것들이 있다: 박정희 정권의 가족계획사업은 ‘조국 근대화’ 프로젝트의 일환으로 설정되면서 목표 할당량을 채우기 위한 저돌적인 방식으로 추진되었고,1 성행위, 피임에 대한 결정권 보장이나 양육 조건의 개선이 이루어지지 않은 상태에서 여성들에게 임신중단은 유일하게 허락된 선택지에 가까웠다. 그래서 이 시기의 높은 임신중단율은 한국 여성들이 자기결정권을 실현하면서 살았다는 증거라기보다는, 여성의 스스로의 삶에 대한 통제권의 부족을 나타내는 지표이다.2 그 과정에서 제대로 된 정보제공 없이 안전성이 의문스러운 방식의 인공임신중절수술을 수차례 받고, 건강을 상하게 된 경우도 흔했다. 임신중단 사실이 알려져 신고를 당하게 되면 사법부는 “국가시책에 의한 가족계획은 어디까지나 임신을 사전에 방지하는 피임방법에 의한 것이고 임신후의 낙태행위를 용인함이 아니”3라며 여성에게 오롯이 책임을 물었지만, 사실 초기 임신중단은 ‘월경조절술’이라는 이름으로 대한가족계획협회의 목표치에 포함되었을 정도로 정부의 적극 개입과 권장이 있었다.4 장애인은 열등한 유전적 소인을 내려보냄으로써 생산성 있는 인구의 생산에 방해가 되는 존재들로 여겨졌기 때문에, 한센인 등은 국가에 의해 단종수술을 강제당하기도 했다.5
이런 사실들은 재고의 여지 없이 ‘나쁜 것’으로 여겨졌다. 과거 정부가 잘못했다는 데에는 사회적 운동의 찬반 양측이 의견 합치를 보이고 있고, 법학계 내에서도 대체로 공유된 인식이다. 하지만 자세히 들여다보면, 위 사실들에 대한 ‘나쁘다’ 이상의 상세한 가치 평가와 해석은 저마다 다르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낙태죄 폐지 운동은 인구정책으로 인한 폐해들을 지적함으로써 앞으로는 국가가 아니라 여성이 임신중단 여부에 대해 스스로 결정할 수 있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반면, 과거 정부의 인구정책에 대한 낙태죄 폐지 반대 운동의 비판은 낙태죄를 정상화함으로써 이제는 국가가 태아와 여성 모두를 보호해야 한다는 주장으로 이어졌다.6 법학계에서는 위 사실들을 ‘태아 생명권을 주장하는 사람들의 진정성에 대한 비판’의 근거로 위치시키는 경우가 많았다. 이는 사법부에게 남은 과제가 그러한 사정을 참작하여 태아 생명권과 여성의 자기결정권 사이의 비교형량을 ‘제대로’ 수행하는 것이라는 결론으로 이어지곤 했다. 2019년 4월 11일 헌법재판소의 낙태죄 헌법불합치 결정문에는 인구정책이 언급되긴 했지만, 낙태죄가 임신중단율을 낮추고 태아의 생명을 보호하기 위한 실효적인 수단이 아니라는 판단을 내린 근거들 중 하나로 열거되었을 뿐이다.7
즉, 인구정책에 대한 비판은 여전히/더욱 이야기되어야 할 주제이다. 단순히 낙태죄와 인구정책이 관련되어 있다고 보여주는 것을 넘어, 그 관련성을 어떻게 해석하고, ‘지금, 여기’의 임신중단 사안에 연결시키며, 앞으로 임신중단을 포함한 재생산 영역의 사안들에 대한 해결책을 노정할 때에 어디에 위치시킬 것인지에 대해서 이야기해야 한다. 인구정책이 낙태죄 논의에서 자주 등장하는 키워드가 된 현 시점에도 그 부분에 대해서는 아직 사회적 합의가 이루어지지 못했기 때문이다. 보다 정확하게 말하자면, 그러한 나아간 쟁점들에 대한 페미니스트와 재생산권 연구자·활동가들의 문제의식이 제대로 이해받지도 못한 상태인 것 같다. 과연 실정법을 무력화하면서까지 이루어진 가족계획사업은 ‘특수한’ ‘한국적 상황’으로 인한 ‘일시적 일탈’이었을 뿐일까. 현재까지도 지속되고 있는 의료현장에서의 관행들은 헌법재판소 결정이나 법원의 판결에 있어서 법적 관련성이 없는 사실이고, 단지 사회적 인식을 개선해나가야 하는 부분에 불과한가. 노골적인 ‘강제성’만 없으면 인구조절 자체는 필요한 것, 전체 사회를 위해서 좋은 것이니 국가가 마땅히 노력해야 할 부분인가. 인구조절을 통해 얻어질 것이라고 전제된 공익의 정체는 무엇인가. 인구가 국가의 하향식 개입을 통해서 조절될 수 있는 성격의 것이기는 한가. 다양한 질문들을 뒤로 한 채, 헌법재판소의 낙태죄 헌법불합치 결정으로부터 1년이 지나도록 국회에서의 개정입법안 논의는 임신중단 허용 주수에 대한 고민에 그쳤다. 임신중단 이외의 재생산 권리 보장책에 대한 논의는 부재한 채, 정부는 저출산·고령화 대응에 올해 70조원을 쓰겠다고 발표했다.
2. 한국 낙태죄의 역사는 통제·처벌 위주 인구정책의 역사8
이 절에서는 낙태죄가 처음 한반도에 등장한 때부터 현재에 이르기까지 임신중단 관련 법과 제도의 형성 과정을 시기 별로 분석한다. 계보학적인 탐색은 한국 사회에서 국가의 인구정책적 목적이 임신중단 처벌조문의 제·개정, 법의 실효적 집행 여부뿐 아니라 임신중단 행위를 바라보는 시각(범죄에 대한 사회적 인식)까지 요동치게 만드는 요인이었고, 그것이 특정 시기만 나타난 현상도 아니고 과거의 것만도 아님을 보여줄 것이다. 동시에, 그러한 특징이 낙태죄에 대한 사법부나 법학계의 논의에는 반영된 적이 없음을 알 수 있다.
한반도 최초의 낙태죄 처벌 조문이 가지는 의미를 파악하려면, 일본이 어떤 이유로 해당 규정을 만들었고, 그걸 둘러싼 담론은 어떠했는지, 그것이 식민지 조선에는 어떤 영향을 미쳤는지를 살펴야 한다. 여성이 스스로 임신중단하는 행위를 처벌하는 법률은 일제강점기에 처음으로 등장했기 때문이다. 조선시대 형법은 타인의 폭행 등으로 인해 유산된 경우만을 처벌했으나, 1912년 「조선형사령」이 선포되고 일본형법이 의용되면서부터 여성의 동의 없이 임신을 중단케 한 경우뿐 아니라(부동의낙태죄) 여성 스스로 임신을 중단하거나(자기낙태죄) 여성의 동의를 받아 임신중단을 시행하는 행위(동의낙태죄)도 처벌 대상이 되었다. 일본은 메이지유신을 통해서 서구 문물을 받아들여 근대화를 추진하였고, 이는 서구의 위생관념이나 순결 이데올로기가 ‘문명’과 ‘과학’의 이름으로 도입되는 것을 포함하는 것이었다. 산파의 근대화를 통해 공동체의 통제 하에 있던 출산을 국가 통제 하로 옮겨오고, 사생아에 대한 사회적 낙인을 만들고, 성매매 여성을 병의 근원으로 지목하는 등 일련의 성통제가 가해졌는데, 임신중단의 금지는 그 일환이었다.9 메이지 원년인 1868년 12월, 태정관의 포고로 산파가 낙태를 취급하는 것을 처벌하도록 했고, 1880년 제정되고 1882년 시행된 근대 형법전에 ‘낙태의 죄’를 둠으로써 임신중단 행위 그 자체를 금지하기에 이르렀다. 추후 여기에 군국주의 출생증강 사상이 더해지게 된다. 청일전쟁을 전후하여 일본 정부가 국가에 중요한 것은 전쟁에 쓸 병사의 숫자이며, 그 수를 줄이는 일은 허용될 수 없다는 관념이 낙태죄를 뒷받침하게 되었기 때문이다. 이 같은 일본의 낙태죄 규정은 「조선형사령」을 통해서 식민지 조선에서도 유사한 이념을 품은 채 실행되었다. 인구증가는 공익, 여성의 건강, 도덕이라고 여겨졌고, 낙태죄는 인구증가를 위한 조치로 정당화되었다.
1922년 3월 마가렛 생어의 방문을 계기로, 일본에서 인구정책의 방향에 변화가 생긴다. 반대로 인구를 제한해야 할 필요성이 대두된 것이었다. 당시 일본에서 큰 사회문제로 대두되었던 쌀 소동·불황·실업 등의 자본주의 모순을 식량에 대한 인구과잉 문제로 본 맬서스적 인식이 우생학과 결합하여 이 시기 산아조절운동의 사상적 기반이 되었다. 산아제한의 방법으로 전면에 소개된 것은 피임이었지만, 피임도구의 보급이 어렵고 남성 중심적인 문화 속에서 피임실천이 자리잡기도 힘들었기 때문에 임신중단이 많이 행해졌다. 1920년대 후반 낙태죄의 형량이 태형에서 벌금형으로 낮춰졌다. 나아가, 1931년 ‘낙태법 개정 기성회’가 열리는 등 여성의 권리에 기반한 낙태죄 개정 요구의 목소리가 표출되기도 했다. 맬서스주의와 우생학에 따른 산아조절운동은 국민 개개인의 자유와 권리에 관심을 두지 않았으나, 가난한 여성들은 스스로의 재생산을 조절할 필요성을 느끼고 있었음이 드러나는 대목이다. 반면, 식민지 조선에서는 관련 법률 개정이 한 번도 이루어지지 않았고, 산아제한은 ‘담론’과 ‘실제’로서만 확산되었다. 여성들의 목소리가 담기지 못했다는 점에서도 차이가 난다. 전쟁은 일본 본국의 여성들에게는 국가의 동원에 협조함으로써 다소의 발언권을 획득하는 기회로 작용한 측면도 있으나, 조선에서는 식민지배의 폭압성과 불법상태로 인해 임신중단의 당사자인 여성들의 표현의 통로가 가로막혀 있었다고 보인다.
1930년대 이후 일제는 인구와 식량 문제의 해결방향을 산아제한이 아닌 이민으로 확정짓고, 「유해피임기구단속법」을 공포하는 등 공개적인 피임지식의 보급이나 상담소 설립을 불법화했다. 중국과의 전쟁이 전면화되자 군국주의 인구증강책은 다시금 시행되었고, 이는 1920년대 산아조절운동을 거치기 전보다 우생학적 색채를 강하게 띠고 있었다. ‘대동아공영권’ 건설을 뒷받침할 병력과 노동력을 확보하기 위한 인구의 질적·양적 증강이 목표가 되었던 것이다. 1941년 「국민우생법」이 시행되면서, 악질유전병을 가진 자 이외에 피임 목적의 불임 조치가 금지되었고, 의사가 불임수술이나 인공임신중절수술을 하려면 사전에 신고서 제출이 의무화되었으며, 피임과 임신중단 등 인위적 산아제한이 금지되었다. 「국민우생법」은 식민지 조선에도 3~4년 후에 실시될 예정이었지만, 전황이 급박해지면서 현실화되지는 않았다. 일본 본국에서 출산장려책이 금전적 뒷받침을 통해서 시행되었던 것과는 달리, 비용 문제 때문에 조선에서의 지원은 최소화되고 이데올로기적 선전만 요란했던 탓으로 추론된다.10
이처럼 일제시기의 인구정책은 개인을 통제하고 처벌하는 방식으로 시행되었고, 낙태죄는 그 일환이었다. 지원이나 보상 없이 통제와 처벌이 앞서는 경향은 식민지 조선에서 더 강했고, 심지어 그러한 개인의 희생을 통해 얻어질 것이라 여겨진 ‘공익’도 일본 본국의 것일지언정 조선의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1945년 광복을 맞이한 이후에도, 낙태죄에는 식민지기에 뿌리 내린 인구조절 담론과 우생학이 끈끈하게 부착된 채 지속되었다. 단적인 예로, 1953년 최초의 형법전에 낙태죄 조문을 존치할 것인지에 대한 국회 토론에서 찬반양론 모두가 인구정책적 고려를 가장 주된 이유로 꼽았다. 낙태죄존치론 측은 인구정책적 고려(한국전쟁 이후 인구증가의 필요성), 성풍속유지(전통적 도덕률 유지, 전후 신생국가의 성풍속확립 필요, 간통죄 조문 유지와의 정합성)를 주된 이유로 들었고, 인간의 존엄성(태아의 생명권)도 언급되었으나 앞 두 가지 이유에 비하여 그다지 주목받지는 않았다. 낙태죄폐지론 측은 마찬가지로 인구정책적 고려(인구증가에 대한 규제장치의 필요)와 여성의 사회적·경제적 지위개선을 꼽았다. 그밖에 영아살해죄 등 파생범죄에 대한 우려, 낙태시술의 음성화로 인한 부녀의 생명, 건강 침해 등이 지적됐지만, 여성의 자기결정권 측면은 거의 언급되지 못했다.11 ‘일제 잔재 청산’과 ‘국민의 자유 보장’이 중요한 가치로 부상했던 당시 사회적 분위기에도 불구하고, 낙태죄를 국가의 인구정책의 도구로 바라보았던 식민지기의 관점은 계속되었던 것이다.
1960-70년대 가족계획사업은 위에서 살펴본 인구정책의 역사에 하나의 지층을 더하는 것이었다. 당시 국제인구통제레짐은 아시아의 인구 성장이 서구 세계에 대한 위협이 될 수 있다는 공포와 개발도상국의 빈곤 상태가 공산화를 야기할 수 있다는 예측에 의해 떠받쳐졌다. 그래서 제3세계 정부들이 인구통제정책을 수용했을 시 풍부한 재정적·기술적 원조를 약속했고, 개발 드라이브를 걸고 있던 박정희 정권의 관심은 그러한 외국의 원조와 지원에 있었다. 가족계획사업이 대외적으로 표방한 것은 피임이었지만, 실질적으로는 인공임신중절도 광범위하게 권장되었다. 1964년 6%였던 기혼 여성의 임신중단 경험률은 1979년 48%로 급증했다.12피임과 임신중단을 통해 ‘가족계획’을 하는 것은 ‘국민의 의무’이자 ‘애국’이고 ‘현명한 모성’이라고 의미 부여되었다.13공공연한 비밀로 허용하고 권장하는 것을 넘어, 아예 임신중단을 합법화하려는 시도가 없었던 것은 아니다. 보건사회부 관료들은 1963년부터 1973년까지 10년 동안 8회 이상 임신중단을 합법화하는 법안을 제출했다. 하지만 번번이 보류하거나 철회하게 되었는데, 첫째, 임신중단을 전면적으로 허용했을 때 국가가 공공의 서비스 영역을 관리하고 개입할 만큼 예산을 확보하기 어렵고, 둘째, 성적인 문란과 생명경시 문화를 조장한다는 규범적인 비난을 감당하기 부담스럽기 때문이었다.14
결국 합법적 임신중단이 가능한 예외적인 사유들을 기술한 「모자보건법」을 제정하고(이마저도 1972년 유신으로 국회가 해산된 후 입법권을 대신하게 된 비상국무회의에서 통과시켰다), 실제로는 「모자보건법」이 허용하는 범위보다 훨씬 넓고 광범위하게 임신중단이 이루어지도록 하는 방식이 실현되었다. 정부가 재정적 지출, 도덕적 흠결을 최소화하면서 인구성장률 감소라는 실질을 취하기 위해 고안한 것이었다. 즉, 통제와 처벌을 앞세워 인구조절 목적을 달성하려는 태도와 낙태죄 처벌 여부라는 수단의 활용은 이전 시기와 다를 것이 없었다. 당연한 결과로, 임신중단을 해줄 병원을 찾기 수월한 상황임에도 여성들은 임신중단을 권리로서 경험하지 못했다. 처벌의 가능성이 남아있기에 불안정한 지위에 놓이게 되었고, 의료보험이나 질병휴가 등의 적용을 받을 수 없었으며, 형법 조문의 규범력으로 인해 사회적 낙인과 죄책감으로부터도 자유롭지 않았다.
「모자보건법」 조문에는 우생학적 관점이 지속되고 있다는 사실도 명시적으로 드러난다. 임신중단의 합법적 사유를 규정한 제11조(현행법 제14조에 해당)의 제1항 1호 ‘본인 또는 배우자가 대통령령으로 정하는 우생학적 또는 유전학적 정신장애나 신체질환이 있는 경우’에 ‘우생학’이라는 단어가 직접 등장했기 때문이다. 일본에서는 1941년부터 시행되던 「국민우생법」의 우생학적 단종정책이 1948년 「우생보호법」으로 계승되어 유지되다가, 1996년 「모성보호법」으로의 개정을 통해서 우생사상에 근거한 조항 및 표현이 삭제되었다. 그러나 한국에서는 「모자보건법」이 몇 차례 개정되는 동안에도 임신중단 관련 조문은 그대로 현재에 이르게 되었다.
2000년대에는 저출생이 사회 문제로 지목되었다. 이대로 가면 국민 연금의 지속가능성이 불투명하며, 경제활동인구 대비 부양인구의 수가 너무 커질 것이고, 인구 절벽이 계속되면 아예 한국이 소멸할 것이라는 등 위기 담론이 확산되었다. 그러자 낙태죄는 또다시 죄가 되었다. 2009년 2월 전재희 보건복지부 장관이 “낙태율을 반으로만 줄여도 출산율 증가에 큰 도움이 된다”라고 발언하고, 이명박 정부가 저출산에 대응하는 과정에서 2010년 2월 「불법 인공임신중절예방 종합계획」을 발표했던 것이다. 그에 발맞추어, 태아의 생명에 대한 담론이 힘을 얻기 시작했다. 가톨릭 전통이 뿌리 깊은 서양에서와 달리, 한국에서는 종교적인 이유에 기반한 태아의 생명존중보다는 법적 권리와의 연장선 상에서 추상적 권리로서의 태아의 생명권에 더 초점이 있었다. 대한민국 역사 이래 입법과정과 정책 실행의 실질적인 면에서 태아 생명권이 논의의 주축이 된 적이 없지만, 현실과 유리된 법해석학 체계 내에서는 낙태죄의 주된 보호법익이 태아의 생명권이라는 것이 다수설의 위치를 점하고 있었다. 독일 등 서구의 학설과 판례를 그대로 들여왔기 때문이었다. 막상 서구 대부분의 국가들은 1970~80년대 이미 낙태죄를 폐지하거나 사회경제적 사유에 의한 임신중단을 허용하는 방식으로 변화했음에도, 구체적 현실과의 연결성을 상실한 한국의 낙태법제와 법해석론은 낡은 논리를 고수하고 있었다. 하지만 저출산 담론과 만나면서 새삼 생명력을 부여받게 되었고, 2012년 헌법재판소 결정을 통해서 태아의 성장상태를 막론하고 동등한 생명권의 주체로 보호해야 한다고 선언하기에 이르렀다.15
그러나 2015년 및 2016년 「모자보건법」 일부개정은 국가의 진짜 목표가 태아의 생명권이라기보다 출생률 제고라는 것을 보여준다. 개정을 통해서 난임시술 및 보조생식술의 지원에 대한 규정이 생겼는데, 보조생식기술을 활용한 임신·출산의 경우 선택유산이 수반되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생명발달단계상 동일한 태아라고 하더라도 출생률 제고라는 정부의 목표에 부합하는 경우에는 지원금을 받게 되고 그렇지 않은 경우에는 형사 처벌 대상이 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리고 이전 시기에 형법상 낙태죄를 뒤집지 않고 특별법인 「모자보건법」을 도입했던 것과 마찬가지로, 2016년 정부는 하위 행정명령인 「의료관계 행정처분규칙 시행령」 개정을 통해 낙태죄 처벌을 재가동하려 했다. 불법 인공임신중절 수술이 의료법상 ‘비윤리적 진료행위’에 해당한다는 이유였다.
3. 앞으로는
미국의 페미니스트 법학자 레바 시겔(Reva B. Siegel)은 태아의 생명과 여성의 이익을 직접적으로 저울질하는 방식은 개별 여성의 의사결정 과정으로는 어울릴지 몰라도, 공동체가 임신중단을 규제하는 법률을 통해 여성에게 부담을 부과하는 것을 정당화하기에는 부족하다고 비판했다. 나아가, 낙태죄에 대한 법적 논의에서조차 개별 여성의 관점에서 적합한 틀을 그대로 사용하는 것은 국가가 낙태죄에 대해 가지고 있는 태아의 생명 보호 이외의 이해관계(시겔의 경우 여성에게 어머니됨을 강요하는 것)를 은폐하는 기능을 수행한다고 지적했다.16 한국 낙태죄의 역사는 국가가 인구조절의 필요성을 앞세워 끊임없이 개인의 재생산에 개입했던 역사와 다르지 않다. 그렇다면 개별 여성에게나 적합한 구도를 낙태죄에 대한 법적 논의에 적용했을 때, 국가가 해당 이슈에 있어서 이해관계가 없는 중립적인 심판자처럼 재현되는 것은 더욱 큰 문제라고 할 수 있다. 푸코는 생명정치 개념을 통해서 성과 재생산이야말로 근대 국가가 인구조절을 위해 계속해서 통제와 관리의 손길을 뻗치는 지점임을 보였고, 식민지배와 냉전을 겪은 한국에서의 인구조절 필요성은 한국 정부의 자생적인 것이라고도 보기 어려운 굴절된 상황 속에 놓였었다. 성과 재생산을 매개하여 작동하는 권력들에 대해서 규명하고 언설화하기 위해 남은 과제들이 많다. 낙태죄 논의에서 국가를 지워버리는 것은 도움이 되지 않는다.
그래서 낙태죄와 인구정책의 관련성을 지적했을 때 ‘그러니 이제는 태아 생명권과 여성 자기결정권의 비교형량을 제대로 해야 한다’는 대답이 나오는 것은 해결책이라기보다는 문제 상황 그 자체다. 한국에서는 한 번도 낙태죄가 태아 생명과 여성 선택 사이의 갈등인 적이 없었는데, 어째서 ‘태아 생명권 대 여성 자기결정권’이 되돌아가야 할 준거점으로 설정된 것일까. 중국의 경우 ‘한 자녀 정책’과 같은 엄격한 산아제한 정책을 펼치면서 임신중단을 합법화했는데, 그 과정에서 개인의 재생산 자유와 사회적 지속가능성(sustainability) 사이의 갈등이 논쟁의 양 축을 차지했다.17반면, 한국의 경우 정책 추진의 실질적인 이유와 법적 논의에서의 명목적인 이유가 분리된 기형적인 담론 지형이 형성되어 있다. 한국은 이중 과제를 안고 있다. 인구조절 담론을 낙태죄에 대한 법해석론 내부로 들여오는 것, 그리고 동시에 개인의 인권을 침해하는 인구정책을 멈추고 인구조절 담론에 스며든 우생학적 관점을 극복하는 것. 낙태죄 헌법불합치 이후 마련되어야 할 입법안이 재생산권 패러다임에 기반하고 있어야 한다는 주장은 단지 성교육, 피임, 양육 환경 조성 등 손대야 할 부분이 임신중단 외에도 많다는 의미가 아니라, 개인의 재생산 권리를 인구조절이라는 국가의 이해관계의 대척점에 있는 것으로서 강조하기 위함이기도 하다. 즉, 인구정책에 대한 축적된 문제의식을 향후 재생산 관련 정책 마련의 중심에 두어야 한단 주장인 것이다.
덧붙여, 개인을 통제하고 처벌하는 방식의 인구정책이 인권침해의 소지가 있을 뿐 출생률 증가 혹은 감소를 가져오는 효과만은 확실하단 것은 맞는 말일까. 박정희 정권의 가족계획사업은 주변국들로부터 인구성장율 감소의 성공적인 표본으로 주목받기도 했으니 말이다. 하지만 낙태죄를 통한 형사처벌이 이미 임신중단을 결심한 여성의 결정을 바꾸는 데에 미치는 영향이 미미하다는 사실이 실태조사를 통해서 밝혀졌다.18 개별 여성의 임신중단을 막는데 효과가 없다면 출생율을 높이는 데에도 효과가 없으리라는 추론이 가능하다. 실제로 가족계획사업 시기 출생률 감소가 오롯이 가족계획사업의 정책 효과는 아니라는 연구가 이루어졌다. 1961-65년의 출생률 저하는 전쟁 직후의 짧은 베이비붐이 끝나고 정상적인 상태로 돌아오는 과정으로 보이며, 1960년대 중반 이후의 출생률 감소 역시 이전부터 존재하고 있던 여성들의 출산억제 욕구의 반영으로 해석될 여지가 크다는 분석이다.19 하향식 인구정책이 효과 면에서도 한계가 있다는 사실은 국제적으로도 인지된 사항이다. 1974년 부쿠레슈티(Bucharest) 세계인구총회에 참가한 개발도상국들은 보건의료 체계가 구축되지 않은 상태여도 선진국이 재정, 인력, 기술, 서구의 경영 기술을 잘 조합하기만 하면 하향식 방식으로 제3세계 여성에게 출산조절 서비스를 제공할 수 있으리라는 관념이 비현실적이라고 지적했다. 인구조절을 위해서는 전반적인 건강과 교육 향상, 여성의 고용 기회 증가와 같은 사회경제적인 정책들이 포괄적으로 시행되어야만 하다는 것이다. 또, ‘인구조절이 빈곤과 저개발 문제 해결의 필수적인 선행 요건이다’라는 선진국들의 전제에 문제 제기하면서, 빈곤과 저개발 문제는 단순한 인구의 숫자만이 아니라 인당 소비량 등 분배의 문제가 복합적으로 연루되어 있음을 드러냈다. 한국 정부가 저출생 대책에 많은 예산을 할애하고 있음에도 합계출생률은 지속적으로 감소해서 2019년 0.92명에 달했다. 이제는 인구정책의 기본 전제들에 대해 근본적인 질문을 던져야 할 때라고 보인다.
- 배은경, 「한국사회 출산조절의 역사적 과정과 젠더 – 1970년대까지의 경험을 중심으로-」, 서울대학교 대학원 사회학과 박사학위논문, 2004; 배은경, 『현대 한국의 인간 재생산: 여성, 모성, 가족계획사업』, 시간여행, 2012.
- 양현아, 「범죄에서 권리로: 재생산권으로서의 낙태권」, 양현아 편, 『낙태죄에서 재생산권으로』, 사람생각, 2005.
- 대법원 1965.11.23. 선고 65도876 판결.
- 지승경, 「대한가족계획협회의 초기 임신중절로서의 월경조절술(Menstrual Regualtion) 제공에 대한 연구(1974-1990): 국가의 위법적 재생산 정책에 대한 소고」, 여성학논집 제36집 1호, 2019.
- 김재형·오하나, 「한센인 수용시설에서의 강제적 단종·낙태에 대한 사법적 해결과 역사적 연원」, 민주주의와 인권 제16권 제4호, 2016.
- 여성의 임신중단을 형사처벌해야 임신·출산·양육할 여성의 권리가 더 잘 보장된다는 주장은 근거가 빈약하고, 자기결정권의 본질적 의미와 배치되고, 여성의 성역할에 대한 편견을 담고 있는 것이지만, 이에 대한 비판은 본 글의 주된 목적이 아니므로 생략한다.
- 헌법재판소 2019.4.11. 선고 2017헌바127 결정.
- 이은진(2017), 「낙태죄의 의미 구성에 대한 역사사회학적 고찰-포스트식민 법제, 정책, 담론 검토」, 페미니즘 연구 제17권 2호의 내용 일부를 수정한 것.
- 후지메 유키, 김경자·윤경원 옮김, 『성의 역사학: 근대국가는 성을 어떻게 관리하는가』, 삼인, 2004.
- 소현숙, 「일제 식민지시기 조선의 출산통제 담론의 연구」, 한양대학교 석사학위논문, 1991.
- 한국형사정책연구원, 『형사법령제정자료집(1)』, 刑法, 1990.
- 한국보건사회연구원, 『인공임신중절 실태에 관한 연구 –일부 중도시 지역의 시술기관을 중심으로-』, 한국보건사회연구원, 1990.
- 배은경, 앞의 책, 2012.
- 이지연, 「처벌과 배제: 낙태, 한국의 여성과 국가」, 한국사회학회 사회학대회 논문집, 2012.
- 헌법재판소 2012.8.23. 선고 2010헌바402 결정.
- Reva B. Siegel, Reasoning from the Body: A Historical Perspective on Abortion Regulation and Question of Equal Protection, Stanford Law Review Vol.44 No.2, 1992.
- Marisa S. Cianciarulo, For the Greater Good: The Subordination of Reproductive Freedom to State Interest in the United States and China, Akron Law Review Vol.51, 2017.
- 김동식·황정임·동제연, 『임신중단(낙태)에 관한 여성의 인식과 경험 조사』, 서울: 한국여성정책연구원, 2018.
- 배은경, 앞의 책, 2012.
'전망 > 공동체' 카테고리의 다른 글
[페미니스트 프리즘 #2] '정의연 사태'와 쉽게 쓰인 글들 (0) | 2020.06.26 |
---|---|
[페미니스트 프리즘 #1] 인사말 (0) | 2020.06.22 |
[집담회] 설리와 나 (0) | 2020.01.06 |
[게재논문]낙태죄의 의미 구성에 대한 역사사회학적 고찰 - 포스트식민 한국사회의 법제, 정책, 담론 검토 (0) | 2018.03.19 |
[월간 틀 기고] ‘낙태’가 ‘여성’ 이슈? – 지금도 아니고 앞으로도 아니다: 낙태죄 담론 개괄과 사회정의로서의 낙태 재구성 (0) | 2017.03.17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