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전망/공동체

[집담회] 설리와 나

설리의 죽음을 아파한다고 해서 타인의 삶에 대한 편집권이 주어지는 것은 아니라고 믿는다. 설리가 왜 죽었는지, 누가 설리를 죽였는지를 중심으로만 갑론을박이 오가는 상황이 추모나 애도와는 거리가 멀다고 느꼈다. 자살 소식에 의해 크게 흔들린 사람으로서 나 또한 머리 속에서 그녀의 죽음의 이유를 내 멋대로 추측하고 그려보지 않았던 것은 아니나, 속으로 삼켜야 하는 말도 있는 법이다. 적어도 활동가나 지식인으로서 공적인 발화를 할 때에는. 그래서 망설이다 참석한 집담회에서는, 적절한 추모의 방식이 무엇일지에 대해서 주로 이야기했다. 그 중에서도 페미니스트 지식인들이 설리의 자살을 다룬 방식에 대한 비판적인 의견을 말했다. 몸 담고 있어 잘 아는 대상에 대해 말하는 것 정도가 나에게 허락된 영역이라고 생각했다. 설리의 죽음이 악플 때문이라는 주장을 비판하면서 여성혐오 때문이라고 하면, 그 말이 지워버리는 측면은 없다고 보는가. 페미니즘을 지지한 다른 여성 연예인들과 달리 설리는 페미니스트들로부터도 온전히 지지받지 못했다. 로리타 컨셉 사진을 찍었다고 해서 "네가 여성인권을 후퇴시킨다"고 악플을 단 일부 넷페미가 아니라 해도, 페미니스트 지식인들 사이에는 설리를 페미니즘적으로 분석하기에 흥미로운 대상으로만 여기는 분위기가 분명 있었다고 본다. 그렇지만 섣부르게 '페미니스트 고 최진리님'을 기억하겠다는 말들 속에, 노브라와 낙태죄 폐지 지지 외의 설리의 모습은 그저 평범한 20대 소녀의 삶으로 뭉게져버렸다. 더불어 잘려나간 것이 그와 잇닿은 자기 기여분에 대한 성찰의 단초였다고 생각한다. 추모는 그것을 인지하는 데에서 시작해야 함에도. 애초의 결심과는 다르게, 집담회가 진행되다 보니 설리의 죽음이 나에게 어떤 의미로 다가왔는지 정도는 이야기하게 되었다. 그 자리에 모인 네 명의 생각이 꽤나 서로 달랐음에도 불구하고, 이 대목에서는 모두 공감했다. 지금 이 사회에서 "내가 나대로 살면 죽을 수밖에 없는 걸까" 하는. 기사 제목은 저 문장으로 결정된 모양이다. 집담회에서 오간 대화가 더 궁금하신 분들은 기사 제목을 검색하면 전문을 찾아볼 수 있다. 두시간짜리 대화록을 짧은 지면에 옮겨내는 어려운 일을 미나가 해주었다.

 

2019.11.04.

대화록 전문 :
한겨레21 제1286호 "내가 나대로 살면 죽을 수밖에 없는 걸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