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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평/기타

[드라마] '나의 아저씨' : '키다리 아저씨'를 비틀어내다


  '나의 아저씨'는 논란이 많은 작품이었다. 방영 전부터 주인공 커플의 나이차가 부각되어 뭇매를 맞았고, 제작사가 인물관계도를 수정하여 둘 사이 애정선을 지운 뒤에도 비판이 끊이지 않았다. 개별적인 씬의 연출이나 대사에 대한 문제제기도 있었지만, 주된 비판의 초점은 '처지가 훨씬 나은 40대 아저씨 옆에 최악의 현실에 처해있는 20대 여성을 붙여서 아재들이 자기위로하게 하는 드라마'라는 점인 듯 하다. "기득권 아재들의 피해자 코스프레"(황진미), "아재들을 위한 위무곡, 아재에게도 결례"(이승한), "'영포티' 판타지 재생산하는 게 예술?"(김종성) 등. 김종성은 한 발 더 나아가, "왜 굳이 45세 남성과 21세 여성이 서로의 삶을 치유해야 하나"라며 "SBS <키스 먼저 할까요?>에서 손무한과 안순진, 두 중년 남녀의 관계가 훨씬 더 자연스럽고 설득력 있지 않은가"하고 말하고 있다. 즉, 연인관계가 아니라 해도 이 드라마가 나이든 아저씨와 나이어린 여성을 주인공으로 삼은 것은 비판받아 마땅하다는 것이다.

  하지만 특정소재의 사용을 금지시키는 것이 발전적인 방향일 수는 없을 것이다. 예술의 자유 운운하는 흔한 구도를 반복하려는 게 아니다. 오히려 그 전에, 모든 작품은 이전 흐름과 동떨어져서 존재할 수 없으며, 기존 작품들의 설정을 일정정도 수용한 위에서 창조적 작업을 더해 내놓게 되므로, 소재의 동일성이 메시지의 동일성을 담보하지 않기 때문이다. 단적인 예로, 부잣집 남성과 가난한 여성이 맺어지는 신데렐라 스토리는 성차별적 인식을 깔고있다 여겨지지만, 그 설정을 가져오되 전개방식을 비틀어서 비판적인 메시지를 던지는 작품들도 있었다. <발리에서 생긴 일>, <청담동 앨리스>, <풍문으로 들었소> 등. 40대 남성과 20대 여성의 특별한 관계맺음을 주제로 삼았다는 사실 자체가 아니라, 그러한 설정 위에서 어떠한 전개방식을 취했는가를 보다 섬세하게 살펴봐야 할 이유이다.

  그런 관점에서 본다면, '나의 아저씨'는 기본설정에서 반사적으로 연상할 만한 기대들을 배반해가면서 스토리가 전개되는, 비틀기의 드라마였다고 할 수 있다. 드라마 초반부의 이런 지점들을 짚어낸 글로는 이정희의 비평을 눈여겨 볼만 하다. 그는 언뜻 보기에 약자인 이지안이 사실은 사회생활 내공백단의 '도시 게릴라'이며, 나이만 먹었지 '새장 속의 새'에 불과한 박동훈의 목줄을 틀어쥐고 있다는 것에 주목한다. 흔히들 연상하는 것 같은 '불편한 성적 관계' 혹은 그것을 낭만화시킨 아저씨와의 로맨스는 사절, 그렇다고 든든한 후원자 '키다리 아저씨' 따위도 없다 - 이것이 '나의 아저씨'가 제시하고 있는 전복적 담론이라는 것이다. 실제로 드라마는 그 이후에도 계속해서 둘의 관계가 로맨스와도 일방적인 후원관계와도 거리를 둔 채 두터워지는 것을 보여주고 있다. 어느새 의지하게 되어 연정을 품어버린 이지안의 고백에도, 박동훈은 똑같은 눈높이에서 연애감정을 되돌려주지도 그렇다고 관계를 단절시키지도 않으면서 끝까지 어른의 역할을 다하는 모습이다. 나는 이를 두고 '젠더'와 '계급'을 덮어버리는 화해라고 부르는 것에 회의적이다. 있는 것을 없는 것처럼 그리는 것이 아니라, 서로 다른 위치에 부과된 자신의 역할을 다해가면서 서로 마주보기를 그만 두지 않는 두 사람을 보여주고 있는 드라마라면. 그것은 오히려 '젠더'와 '계급'을 넘어서는 만남, 사람 대 사람의 관계맺음의 가능성을 그리고 있는 작품이라 하는게 정확하지 않을까.


2018.05.2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