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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평/문학

동화책 『사자왕 형제의 모험』


"낭기열라 골짜기에서 이들 형제가 벌이는 모험은 평화주의자가 어디까지 악과 맞설 수 있는가에 대한 치열한 실험이면서 힘없는 사람들 사이에 강물처럼 흐르는 역사의 선한 의지에 대한 입증의 과정이기도 하다. 선한 자는 실패할 리 없고 잠시 주저 앉더라도 그 뒤에는 낭길리마의 햇빛이 기다리고 있다는 것이 작가가 책 속에 담은 희망이다.
아스트리드 린드그렌이 이 책을 처음 내놓았을 때 다양한 비판이 등장했다. 부당한 억압으로 가득한 세계를 바로잡는 어려운 일을 굳이 어린 형제의 손에 맡긴 이유가 무엇인가, 현실에서 낭기열라로, 낭기열라에서 낭길리마로 이어지는 죽음을 각오한 여행은 불교에서 말하는 윤회의 영향인가 등 어른 평론가들의 날선 질문이 꼬리를 물었지만 그보다 더욱 많이 답지했던 것은 어린이 독자들의 편지였다. 어린이들은 이렇게 물었다. "요나탄과 동생 칼은 낭길리마에 잘 도착했겠죠?" 영원한 용기에 대해서, 끝없는 사랑에 대해서 어린이는 믿음을 버리지 않았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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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재자의 서슬이 퍼렇던 1983년 서울의 여름, 이 글을 쓰고 있는 나는 린드그렌의 이야기를 듣고 싶어 하는 한국의 한 어린이였고, <사자왕 형제의 모험>을 읽고 펑펑 울었다. 어렴풋이 물정을 알 만한 나이였지만 낭기열라 골짜기와 우리나라의 현실을 곧바로 대입하지는 못했던 것 같다. 그보다는 왜 나는 그토록 겁 많은 칼과 닮았는지, 나에게는 왜 요나탄 같은 형이 없는지, 우리는 결국 들장미 골짜기를 구할 수 있을지 생각하면서 책 위에 한참 엎드려 있었다. 오로지 한 가지가 너무나 궁금했다. 요나탄과 동생 칼은 낭길리마에 잘 도착했는지. 그리고 이 한권의 동화책은 지금까지 나의 삶을 중요한 순간마다 바꾸어 놓았다.
희망은 손을 놓지 않는 사람의 것이다. 무시무시하면서도 이루 말할 수 없이 아름다운 것이 생명이고 삶이라고 작가는 말한다. 눈앞에서 어린 손을 놓은 어른으로서 지금 우리가 무슨 할 말이 있겠는가. 어린이에게 책을 권한다는 것조차 잔인하게 느껴지는 사회다. 그러나 어디선가 칼의 몸으로 요나탄의 꿈을 꾸며 웅크리고 울먹이는 어린이가 있다면 그 작은 손에, 그 손을 잡아야 할 또 다른 손에 건네주어야 할 것으로서 이만큼 정확한 선물은 없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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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10. 김지은, 해설 '어느 용감한 작은 손에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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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강의 인터뷰 속에 등장한 동화책이 룸메의 책장에 꽂혀있는 우연 덕에, 어제오늘 빠져들어 끝까지 읽어내려간 책. 아아 인터뷰에서 언급된 맥락이며, 목가적인 판타지물에 대한 내 취향이며를 고려했을 때 어느 정도 예상은 했지만.. 나는 꽤나 울어버리고 말았다.
역경과 비참 사이로 대동사회와 같은 유토피아가 간간히 어른거릴 때에. '정의감'과 같은 단어로 결코 간단히 환원되지 않는, 불의에 항거하는 사람들의 서로 다른 동기들이 알알이 도드라지는 때에. 그리하여 그들의 용감한 업적 혹은 행위가 아니라 그 사람 자체가 하나의 인격체로서 내 경계를 뚫고 다가올 때에. 자유를 갈망하는 투사이자 지도자 오르바르, 언제나 선하고 용감한 윤리성의 담지자 요나탄 뿐 아니라 겁 많은 스코르판도 빛나고 반짝인다고 느꼈을 때에. 스코르판이 사자왕 칼이 되는 데에서, 두려움을 직면케 하는 사랑과 연대라는 게 세상에 있다는 사실이 못견디게 아름다웠을 때에. 아주 많이 벅찼고 오래토록 충만했다.


2017.5.2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