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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뷰/도서

학교폭력의 발생·지속·재생산 기제: 「이지메의 구조」(일본)

나이토 아사오 지음, 고지연 옮김, 이지메의 구조: 왜 인간은 괴물이 되는가, 한얼미디어, 2009




-매스컴이 이지메 자살사건으로 떠들썩해질 때마다 식자들은 이지메의 원인론들을 내어놓았다. 이 견해들 가운데는 실태와 거리가 먼 것도, 가까운 것도 있지만 제대로 개념을 파악한 후에 논리를 세운 흔적은 보이지 않는다. 그 결과, 서로 충돌하여 심각한 모순에 빠져있다.

ex) 지나친 입시경쟁과 주입식 교육이 아이들의 마음을 좀먹고 있다 vs 학문에 힘써서 입신하겠다는 목적의식이 희박해진 결과, 학교에서 공부할 의욕이 저하되고 자세가 흐트러져서 수업이 잘 이루어지지 않는다

학교의 과잉관리 vs 학교질서의 해이, 규범의식의 결여

무엇을 해도 용서된다는 욕망의 자연주의. 혹은 청소년의 자기중심적 사고. 자아가 너무 강하다 vs 개인의 취약화. 늘 남의 눈을 신경쓰느라 자신이 하고싶은대로 하지 못한다

'요즘' 청소년들은 유아화되었다. 정신적으로 미숙해졌다. 욕구불만 내성이 결여되어 참을성이 없어졌다 vs 집단역학이나 강자의 논리에 따라 굴복하고 눈치를 살피고 약삭빠르게 행동한다. 아이들의 사회도 어른들의 사회와 마찬가지로 교활함이 횡행하는 '속세'로 변질되어 '순진한 아이다움'이 사라졌다.....

등등


 => 이런 식의 사고의 혼란은 질서를 단수라고 보는 데서 발생. 질서를 다양화해서 복수로 생각하면 상기의 난제는 해결된다.



질서의 생태학 모델

질서에는 복수의 타입이 있고, 우리는 날마다 커뮤니케이션을 통해 A질서, B질서, C질서...라는 다양한 로컬(소사회) 질서를 만들어내며 그 속에서 살아가고 있다. 이 각각의 질서들은 순수하게 그 하나만으로 존재하는 일은 드물다. 어느 한 타입의 질서는 다른 어떤 타입의 질서와의 관계 안에 자리를 차지하며 존재한다. 이러한 다양한 질서들의 대립과 충돌로 A리얼리티, B리얼리티, C리얼리티..라는 여러 현실감각이 '당연한' 위치를 서로 쟁탈하고 있다.


군생질서와 시민사회의 질서

-시민사회의 질서: '지금·여기'의 분위기를 초월한 보편적인 이념이나 룰에 따라 사물의 시비를 구분하는 타입의 질서를 '보편질서'라고 부를 수 있다. 보편질서 중 현대의 여러 선진국에서처럼 휴머니즘(인권, 인간의 존엄, 자유, 평등 등)과 결합된 유형을 '시민사회의 질서'라고 부르기로 한다.

-군생질서: '지금·여기'의 규칙 속을 '모두' 함께 살아가는 형태가 그대로 공포의 대상이 되고 '옳고/그름'을 분별하는 규범의 표준점이 되는 타입의 질서. 무리의 힘에 의한 질서.

=> 이지메의 장場은 시민사회의 질서를 기준으로는 '질서의 해체' '인간관계의 희박', 군생질서를 기준으로는 '질서의 과중' '관계의 농밀'.


"그들의 질서가 그들의 분위기에 좌우되는 질서일수록 그 규칙이나 '감정'의 배분을 둘러싼 신분관계는 준엄하고도 가혹한 것이 되어버린다. 그때그때 달라지는 모두의 분위기에 신경을 쓰고, 그 분위기에 맞춰 자신의 위치(주제)를 파악해야만 한다. 이 미묘한 선긋기에 조금이라도 실수를 범하면 재수가 없거나 자기중심적인 존재로 전락하고 만다."

"이러한 로컬 질서 속에 존재할 수 있는 현실감각은, 우리에게 '인간이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을 던진다. (...) 규칙의 질서에 의하면, 한 인간의 존재는 그때그때의 '모두의 기분' 혹은 분위기에 따라 개별적으로 평가되는 것일 뿐 인간이 인간이라는 이유만으로 보편적으로 주어지는 것이 아니다. 인간은 관계의 총체인 것이다. 이지메를 일삼는 자들에게 철학적인 사고가 가능할 리 없겠지만, 그들은 근대의 실체주의를 초월한 철저한 관계주의와 사회구성주의를 '지금·여기'에서 체현하고 있다.

이를테면, 이지메 놀이는 '우리'의 소중한 규칙을 영위하는 수단이며 그 규칙에 입각해서 인간의 위치와 가치가 정해진다. 규칙의 질서 안에서 괴롭힘을 당하는 자의 신분은 그때그때의 규칙을 몸소 받아들여 공명하는 도구, 즉 모든 관계의 매듭(모두의 장난감)으로써만 존재 의의가 있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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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완전감과 전능감

존재하는 것 자체가 불안하고 세상이 잘못되었다는 식의 막연한 불안감과 초조감. 즉, 존재론적 불완전감에 직면했을 때 분노를 느낌. 이것들 집단적인 폭력으로 형상화하는 순간, 소년들은 전능감에 의해 이 분노로부터 자신을 보호하고 무엇이든 할 수 있다는 기분을 느낀다. 이 전능감全能感은 존재론적 불안감을 초기 조건으로 해서 발생하는 그 불완전감의 반전(역전)현상.


심리사회적 연료 사이클

집단으로 폭력을 휘두르게 되면 폭력 자체가 주는 전능감과 폭력을 중심으로 무리지어 서로 영향을 미치는 전능감이 하나의 축제감각으로 압축되어 있다. 따라서 '폭력의 전능감을 중심으로 무리 형성→이 무리의 형태에 따라 범위가 정해지고 다음 시점의 폭력의 전능감이 성립→이 폭력의 전능감을 중심으로 다음 시점의 무리가 형성'가 반복됨.

이러한 군단의 사이클이 돌아감에 따라, 전능을 추구하는 내적모드가 현저히 두각을 드러내면서 기존의 내적모드에 의한 삶의 리얼리티가 해체되어 희박해진다. 지금까지 익숙하고 친숙했던 세계가 망가진 것이기 때문에, 최초의 존재론적 불완전감(화가 치미는)이 재생산되고, 그로 인해 더욱 전능을 추구하게 된다. 이것의 반복이 불완전감과 전능감의 이른바 심리-사회적 연료 사이클.


타인을 조종함으로써 얻어지는 전능

타인이란, 나와는 별개의 의지를 가지고 독자적인 세계를 살고 있는 사람. 그렇기 때문에 이지메의 가해자는 타인의 운명 혹은 인간 존재 그 자체를 자기 손아귀 안에서 마음대로 조종함으로써 전능의 힘을 더욱 강하게 느낀다. 뜻대로 움직일 리 없는 타인이기 때문에 더 멋대로 조종하고 싶어 하는 것.

"이지메 가해자는 이지메의 대상에게도 기쁨이나 슬픔이 있고 그 자신의 세계를 살고 있다는 것을 인지하고 있기 때문에, 그래서 더욱 그 존재를 통째로 짓밟고 말살하려 든다. 이지메 가해자는 자기 손에 의해 원하는 대로 무너져가는 피해자의 불행을 보면서 (마음대로 될 리 없는) 타인을 마음대로 조종하고 있다는 전능함을 느끼려고 한다. 이러한 욕망의 틀을 가해자는 이미 가지고 있고, 얻어맞아 얼굴이 일그러지는 등의 피해자의 고통에 의해 현실화된다. 이것이 이지메의 전능모형이다."


이지메의 삼원색: 自-他 역할

-이지메의 自-他 역할의 기본형: '자신의 손에 의해 비통 속에 존재 자체가 파괴되어가는 타인'과 '그 타인의 스러져가는 숨결과 고통을 향유하면서 완전하게 타인을 조종하는 자신'

-이 전능모형의 기본형은 현실에서 구체적인 이지메로써 모습을 드러낼 때 다음의 세 가지 타입으로 나뉜다. 다종다양한 색채가 색의 삼원색에서 탄생하듯, 이지메의 다양한 형태도 이 세 가지 레퍼토리의 조합으로 설명된다.


(1) 파괴신 - 무너져 내리는 희생물

압도적인 기세로 피해자를 단숨에 파괴하는 힘을 즐기는 형태

(2) 주인 - 노비

명령-복종의 형태가 이지메의 전능모형으로 바뀌어 사용된 경우. 마음대로 부려먹음으로 인해 얻는 실리와 전능감을 모두 취하는 일거양득의 방식. 그러나 실용적인 노예 사용의 논리와 달리, 전능감을 느끼기 위해서는 편의성 극대화보다 노비의 소모와 피로를 노리게 됨.  ex)간식 심부름을 시킬 경우, 엘리베이터 사용을 허용하는 편이 간식을 빨리 먹을 수 있을텐데도 금지.

(3) 희룽거리며 장난치는 신 - 그의 장난감

새로운 접속선을 끌어와서 다른 차원의 맥락을 있을 수 없는 방식으로 억지로 연결하고, 마음먹은 대로 사물의 이치 그 자체를 단번에 파괴해가며 재창조. 그리고는 생각지도 못한 형태로 변한 것에 쾌감을 느끼고 포복절도하는 형태.  ex)실험용 가위로 성기를 잡고 샤프펜슬을 넣는다, 상대가 지쳐 죽을 정도로 심하게 폭력을 휘두르면서 춤이나 노래를 시키고 이상한 구호 따위를 외치게 한다.


"전술한 세 가지 전능모형에 있어서는, 자신과 타인(도구)은 극도로 상호의존적이다. (...) '완전하게 조종하는' 가해자 자신은 '완전하게 조종당하는' 타인의 반응에 자신의 존립 여부를 내맡기고 있다. 그 반응을 기반으로 하여 전능모형을 구현하지 못하면 전능감을 내세워 속여오던 자신의 '결핍', 즉 불완전감이 드러나고 만다.

신분이 낮은 자가 뜻대로 당해주지 않을 경우 이 불완전감이 노출됨으로써 가해자 쪽이 피해의식을 느끼고 격분한다. 여기에서 전능모형을 구현하려던 자의 '전능에서 벗어난 분노'가 생겨난다.

이 분노가 생기고 있을 때에는 특히 '파괴신과 무너져 내리는 희생물'이 유발되기 쉽다. '전능에서 벗어난 분노'는, 타인을 뜻대로 조종하지 못해 파멸로 치닫고 있는 감각을, 그 타인을 파괴하는 '파괴신'의 감각으로 재활성화하려고 하는, 실로 제멋대로인 '자기 수복'의 영위이기도 하다."


"'파괴신과 무너져 내리는 희생물'과 '희룽거리며 장난치는 신과 그의 장난감'의 압축형에 의해 이지메의 전능모형이 구현되는 경우 가해자들은 입, 성기, 항문 따위의 신체 개구부와 관련된 이지메 형태를 선호한다. 이것으로써 가해자는 자신과 타인의 경계를 파괴하고 내부에 침입하여 마구 휘젓고 오염시킴으로써 '파괴신과 무너져 내리는 희생물'의 모형을 생생하게 체험할 수 있는 것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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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지메의 피해자가 이지메의 가해자가 되는 기제

압도적인 강자로부터 불합리하게 고통을 받아서 시키는 대로 하고 굴복할 수밖에 없는 비참한 체험은, 일반적인 기억(인생 이야기)과는 감정적으로 분리되어 피해자에게 들러붙음. 이 동결된 기억은, 하루하루를 살아가는 인생의 지평에 막연한 불안과 비참함을 지속적으로 발산. 이러한 '결핍'을 안고 있는 자가 이지메의 기회를 획득하면 '정화淨化의 의식'에 사로잡히는 경향이 있음.

"가령 자신이 괴롭히고 있으면서 괴롭힘을 당하고 있는 상대(과거의 자신이 투사된 대상)를 보며 공연히 짜증을 낸다. 그리고 점점 더 심하게 괴롭히고 으스대며 초월이나 달관하는 법을 가르치거나 화를 내고 폭력을 가한다. 이렇게 상대를 한껏 괴롭히고 나서야 비로소, 괴롭힘을 당하는 것이 아니라 괴롭히고 있는 자신을 마음 깊숙한 곳에서 확인하고 과거의 비참했던 자신에게서 조금 탈피한 듯한 기분을 맛본다. (...)

즉 이지메는, 자신에게 있어서 견디기 어려운 체험 양식이 되어버린 모형(불합리하게 고통을 가하는 타인과 비참한 자신)을 타인을 이용하여 좀 더 쾌적한 것(박해자로서의 자신과 비참한 타인)으로 가공하는 '치유'의 작업인 셈이다."


약자에게 있어서 강인함

벗어날 수 없는 압도적 부당함에 굴복하며 살아갈 수밖에 없는 자는, 견디는 일 자체를 '강인함'이라는 전능모형으로 변조하곤 한다. 당하는 대로 할 수밖에 없는 비참함이, 당하는 대로 견뎌내는 힘으로 바꿔치기되는 것. 약자의 헛된 전능으로서의 강인함. 이렇게 체험을 가공하여 비참함으로 부정하고 인내의 미학을 학습하면서 오로지 '처세'의 기능(조용히 분위기 파악하기, 타인의 안색 살피기, etc.)을 습득한다. 


재생산되는 이지메: 반복되는 비극

"고통의 과정을 거쳐 강인해진 자들은 슬픔이나 아픔, 정의, 인간다운 감각(휴머니즘)을 단절하고 자신을 무쇠와 같은 강인한 이미지로 개조하는 일에 자기 자극적으로 집착한다.  자신이 죽게 하고 다치게 한 피해자의 가족을 일말의 죄책감도 없이 무표정하게 마주한다는 것은, 여리고 상처받기 쉬운 마음을 버리고(극복하고) 인간이기를 초월한 무쇠와 같은 강한 이미지를 부여한다. 이것이야말로 '강인함'의 진수이다.

그들이 처세하며 사는 사회에서는 충분히 강인해진 자가 강인해질 수 없는 자를 장난감으로 취급하며 노는 것은 정당하다. 그리고 그들은 자기들 나름의 소사회에서 살아가며 그런 '권리의식'을 갖춰간다. 이지메를 견뎌낸 체험이 강하면 강할수록 이 '권리의식'도 강해진다. 허울 좋은 말을 하는 자들에게 이 '권리'를 침해(부정)당하면 격하게 분노한다.

자기 자신이 갖은 박해 속에서 필사적으로 처세하여 강인해졌다는 자부심(생존의 미학)과 세상이란 그런 것이라고 여기는 질서 감각이 이러한 사태를 낳고 있다. (...)

강인함의 미학은 괴롭힘을 당하는 자는 한심하다든지, 괴롭힘을 당하면 스스로 단련하여 괴롭히는 자가 되면 된다는 생각을 초래한다. 그들은 자신을 고통스럽게 한 대상이 강인함의 미학을 가르쳐주었다는 식으로 체험을 가공하는 한편, 강인해질 수 없는 한심한 자를 향해서는 억누를 수 없는 분노와 공격의 욕구를 느낀다. (...)

집단생활 속에서 강인함이 몸에 밴 자는 불행의 평등주의에 위배되는 행동에 민감하게 반응한다. 갖은 고통을 거쳐 강인해진 자는, 고통을 겪지 않고 세상과 자신 사이에 경계를 긋는 일에 성공해서 행복해 보이는 자를 대면하면 피해의식과 증오에 휩싸인다. 그리고 기회가 주어지면 고통을 느끼게 해주리라 결심한다.

학교의 집단생활은 '고통을 당해서 비뚤어진' 자들에게 그러한 기회를 얼마든지 부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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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해타산과 전능의 접합

전능 갈망만으로 살아가는 자는 거의 없다. 복잡한 현실은 이 비뚤어진 정념만으로도 이해利害 구조만으로도 설명할 수 없고, 이 둘은 접합하여 상호 내장되어 작동한다.


권력과 이해도식

이해 도식들 중에는 전능 도식으로 전용되기 쉬운 타입과 어려운 타입이 있다. "권력"을 담은 이해도식은 전능감을 느끼기 위한 템플릿으로 그 형태를 모방하기가 매우 용이하다.

"권력에서 악취가 나는 것은, 이해 도식에서 비롯되는 권력의 골격 때문만이 아니라 그 형태가 전능 도식으로 쉽게 전용될 수 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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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교제도가 미치는 영향

"현행 학교공동체제도는 자신의 안전을 둘러싼 이해관계를 구조적으로 과밀화한다. 그 토대 위에서는 타인의 기분으로부터 자신이 안전하게 존재하기 위한 발판이 쉽사리 무너져 내린다. '눈 감으면 코 베어 간다'고 하듯이 언제 어떻게 친구들이나 선생님에게 허를 찔릴지 모르는 가혹한 환경에서는 '자신의 안전'이나 '태연하게 지낼 수 있는 신분'이라는 희소가치를 둘러싼 인간관계의 정치가 과도하게 의미를 가지며 터무니없이 비대하다. 즉 전인적인 '공동체 교육'을 목표로 한 설계가 최저한의 안전을 유지하는 데 필요한 사회적 자원의 비용을 폭등시키고, 그 결과 가혹한 정치 공간을 낳고 있다.

(...) 강제적 공동체주의인 학교제도는 생활공간의 박해가능성밀도를 현저히 높인다."


학교를 성역시하는 사고

학교라는 곳은 마음과 마음의 교류로 개개인의 다양한 기분이나 행동이 서로의 삶 깊은 부분에까지 스며드는 성스러운 공동체로 인식되어 시민사회의 논리를 부단한 노력으로 단절함으로써 특수한 사회로 유지되고 있음. 이는 제도와 정책에 힘입은 학교법, 그리고 우리 사회의 '마땅한 관습'이라는 모습으로 정착되어 있음. 

=> 피해자가 경찰에 신고하거나 고소하면, '교육의 논리'를 '법의 논리'로 더럽혔다며 도덕적으로 비난받게 됨. 대부분의 이지메 피해자들은 학교와 무관한 법적 문제해결이라는 '신성모독'적인 선택지를 생각지도 못하고 고통받게 됨.


커뮤니케이션 조작형 이지메

폭력형 이지메와 달리, 욕설이나 따돌림, 비웃음 등의 커뮤니케이션의 조작에 의한 박해. 폭력형 이지메에서 논한 정치 공간론이나 사회적 자원론이 거의 그대로 적용됨.

자유로운 시민의 상태이면 심리적 거리를 스스로 결정하여 즉각 상대를 피할 수 있기 때문에 피해가 커지기 전 단계에서 대부분 종식된다. 그러나 학교공동체는 아침부터 저녁까지 '함께 지내며 함께 성장하는 관계'를 강제하기 때문에, 심리적 거리를 사적으로 조절하는 것이 실질적으로 금지되어 있는 셈이다. 따라서 일견 대수롭지 않는 행위라고 해도, 인간관계의 거리를 개인이 조절하는 것을 사실상 그지하고 있는 공동체에서는 견디기 어려운 고통이 된다.


학교공동체 속 피해자에게 강요되는 양자택일

(1) 과밀한 집단생활을 강요하는 세계에서 아무런 유대도 없이 몇 년을 아침부터 저녁까지 보내는 것. 심리학의 감각차단 실험과도 같은 견디기 어려운 상태.

(2) 가혹한 짓을 하는 친구에게 정신적인 매춘이라고도 할 만한 굴종을 하며 사이좋게 지내기 위해 자신의 '마음'을 바꾸는 것.

=> 대부분의 학생은 후자를 선택할 수밖에 없음. "인간에게 폐쇄적인 공간이란, 이러한 양자택일을 요구하기 때문에 잔혹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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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태학적 설계주의

질서의 생태학적 배치의 변화를 예측하여 제도·정책적 거시환경을 조성하는 사회 정책론.

(단, 생태학적 설계주의는 군생질서를 환산하기 위해서도 쓰일 수 있음. 따라서 생태학적 설계주의에 근거한 실천 그 자체를 옳은 것으로 볼 수 없음.)


두 가지 단기정책

(1) 학교의 법화法化

(2) 학급제도의 폐지


중장기적 정책

-바람직한 사회의 청사진: '자유로운 사회'  ↔투명한 사회, 개개인보다 공동세계(코스모스)를 중시

"투명한 사회에서는 속박과 박해의 도태압selection pressure으로 관계와 자신의 방식이 결정된다. 반면 자유로운 사회에서는 매력과 행복감이 도태압으로 작용하여 각자에게 적합한 관계와 자신의 방식이 다듬어지고 진화해간다."


-그 자유로운 사회 원리에 근거한 새로운 교육정책을 세워야 함: 

학교 다닐 의무가 아니라 살아가는데 필요한 최소한의 지식(a. 생활 기반 유지에 필요한 국어의 읽고 쓰기, b. 돈을 사용해서 생활하는 데 필요한 산수, c. 자신을 보호하기 위해 필요한 법률과 공적기관 이용법)에 대한 국가시험을 보호자가 아이에게 치르게 할 의무.

* 교육 바우처 제도

* 권리교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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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간집단전체주의

ex) 도나리구미 제도

개개인의 인간 존재가 공동체를 강요하는 집단이나 조직에 전적으로 흡수되어야만 하는 강제적인 경향이 어떤 제도·정책적인 환경 조건하에서 구조적으로 사회에 번성하고 '긴타로 엿'처럼 사회에 편재되어 있으면, 그 사회를 중간집단전체주의 사회라고 할 수 있다.

즉, 중간집단전체주의란 제도·정책적 거시 환경을 발판으로 하여 군생질서가 우위에 놓이고, 그 압도적인 작용이 사회 곳곳에 미치는 것.

"중간집단전체주의 사회에서 사람들을 직접적으로 고통스럽게 하는 주된 힘은, 국가 권력이나 시장의 빈곤화보다는 '생활의 세부에까지 침투하여 인간의 영혼을 노예화하는'(J. S. 밀) 로컬 질서이다. 이는 곧 가까운 관계에서 발생하는 박해나 그에 대한 불안, 그리고 스스로 자신을 혐오스럽게 여기게끔 바꾸어버리는 장場의 변형력이다.

(...) '가난에 졌다, 아니, 세상에 졌다'라고 할 때의 '세상'이란, 이러한 장의 변형력으로 개인의 내면부터 침식해가는 작용이 위협으로 나타나는 사회이다. 이 침식작용은 자신에 대한 불신감, 혐오감, 무력감과 장의 흐름에 대처하는 자신을 놓아버리게 만들고 계속해서 그러한 자포자기를 축적시킨다. 자기 신뢰가 희박한 '고요한 격정'은 모두의 규칙으로써 쉽게 형성되고, 벚꽃처럼 쏟아져 내리는 집단의 박해성을 재생산한다. (...) 자신의 일관성을 믿지는 못하나 별 수 없이 '지금·여기'를 모두에 함께 살아간다. '지금·여기'의 주인은 자신이 아니라, 고난의 공동체에 들끓는 장의 규칙이다.

필요한 것은, 이러한 사회에 이름을 부여하는 것과 이러한 사회를 살아가는 사람들의 구조적인 온갖 형태의 고통을 표면화하는 것이다. 그리고 이 전체주의의 고통에 착안하여 자유로운 사회를 구상하고 사회를 변혁하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