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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뷰/도서

주디스 허먼의 「트라우마: 가정폭력부터 정치적 테러까지」 정리 —성폭력, 가정폭력, 아동학대를 중심으로—

주디스 루이스 허먼 지음, 최현정 옮김, 트라우마: 가정폭력부터 정치적 테러까지(Trauma and Recovery : The Aftermath of Violence), 열린책들, 2012





-외상의 실재를 의식에 붙들어 놓기 위해서는 피해자를 인정하고 보호하며, 피해자와 목격자가 동맹을 맺을 수 있는 사회적 바탕이 필요하다. 피해자 개인을 위한 사회적 바탕은 친구, 사랑하는 이, 그리고 가족과의 관계를 통하여 다져진다. 보다 큰 사회를 위한 사회적 바탕은 힘없는 사람들에게 목소리를 부여하는 정치적 운동을 통하여 다져진다.

그러므로 심리적 외상을 체계적으로 연구하기 위해서는 정치적 운동의 지지가 필요하다. 물론 그러한 연구를 진행할 수 있거나 공론화시킬 수 있다는 자체가 하나의 정치적 문제이다. 전쟁 외상에 대한 연구는 전쟁으로 인한 젊은이들의 희생에 반대하는 정치적 맥락에서 정당하다. 성폭력과 가정폭력으로 인한 외상 연구는 여성과 아이들의 종속에 반대하는 맥락에서 정당할 수 있다. 정치적 운동의 지지를 통해서 이 분야의 진보가 일어날 수 있다. 정치적 운동은 연구자와 환자의 동맹을 정당화하고, 침묵을 강요하고 그러한 현상 자체를 부정하기 일쑤인 사회적 흐름에 반대할 수 있을 정도로 힘이 있다. 인권 운동이 강력하게 뒷받침해주지 못할 경우, 적극적인 증언은 이루어지지 않을 것이고 또다시 망각의 역사가 되풀이될 것이다. 억압과 해리, 부정은 한 사람의 의식 안에서만 일어나는 현상은 아니다. 그것은 사회적 현상이기도 하다. (28p)



-1980년대 초기에 사회학자이자 인권운동가인 다이애나 러셀(Diana Russell)은 가장 정교한 역학 조사를 진행하였다. 무선 표집으로 선별된 900명 이상의 여성들이 참여하였고, 가정폭력과 성적 착취에 대한 심층 면접이 진행되었다. 결과는 무시무시했다. 여성들은 4명 중 1명의 비율로 강간을 경험하였다. 아동기 성학대는 3명 중 1의 비율로 경험한 것으로 나타났다.(62p)



-외상 사건은 특별하다. 사건이 드물게 발생하기 때문이 아니라 일반적인 인간 삶의 적응 능력을 압도한다는 점에서 특별하다. 외상 사건은 평범한 불운과는 다르다. 외상은 대개 생명과 신체적 안녕을 위협하거나 폭력이나 죽음과 직접 맞닥뜨리는 경우와 관련되어 있다. 인간을 무력감과 공포의 극단에 직면시키고, 파국적 반응들을 유발한다. <정신의학 교본>에 따르면, “강렬한 두려움, 무력감, 통제 상실, 붕괴의 위협에 관한 느낌은 심리적 외상의 공통분모이다. (...) 통합된 상태에서 건강하게 기능하는 정교한 자기 보호 체계는 외상에 의해 찢겨진다. (68p)

-사람들은 보통 관계적인 삶에 대한 손상은 외상의 부수적인 결과라고 생각하지만, 이는 사실이 아니다. 외상 사건은 자기라는 심리적 구조뿐만 아니라 개인과 공동체를 연결하는 애착과 의미의 체계에도 주요한 영향을 미친다. 마르디 호로위츠는 외상 사건을 일컬어, 세상과 관계하는 자기에 관한 피해자의 내적 도식에 동화될 수 없는 사건이라고 했다. 외상 사건은 세상이 안전하고, 자기는 가치 있으며, 세계 질서에는 의미가 있다는, 피해자가 가지고 있었던 기본적인 가정들을 파괴한다.(97p)

 


-외상 사건은 대인 관계에 손상을 입히므로, 생존자의 사회적 세계를 구성하는 사람들은 외상의 결과를 바꿀 수 있는 힘을 가지고 있다. (...) 외상 사건이 일어난 이후 생존자는 매우 취약하다. 그들의 자기감은 산산이 부서졌다. 자기감이란 그것이 처음 세워졌던 방식대로, 다른 사람들과의 연결 속에서 다시 세워질 수 있다.(113p)

-민간 재난과 일반 범죄에서 피해자의 가까운 가족과 친구들은 대부분 생존자에게 위안과 안전을 제공하기 위하여 힘을 모아 준다. 그러나 성폭력과 가정폭력에서, 피해자의 안전은 공격 이후에도 위태로운 상태로 남겨질 수 있다. 예를 들어 강간의 경우, 대개 가해자는 피해자가 알고 있는 사람이다. 그는 안면이 있는 사람, 직장 동료, 가족의 친구, 남편, 혹은 애인일 수도 있다. 더 나아가, 공유된 공동체 안에서 가해자는 피해자보다 높은 지위에 있을 때가 많다. 가장 가까운 사람들이 항상 피해자 편이 되는 것은 아니다. 사실, 그녀의 공동체는 그녀보다는 가해자를 지지할 수 있다. 강간범에게서 도망치기 위해 피해자는 자신의 사회적 세계의 일정 영역을 회피하게 될 수 있다. (...) 강간범이 남편이거나 애인일 때, 외상을 경험한 사람은 그 어느 누구보다 취약하다. 일반적으로 안전과 보호를 제공해 주어야 할 사람들이 바로 그 위험의 원천인 까닭이다.(115p)

-여성은 이와 같은 일[강간]을 끔찍한 침해로 경험하지만, 이들과 가장 가까운 사람들조차 그렇게 생각하지 않을 수 있다. 따라서 생존자는 자기 자신의 관점을 표현하는 것과 다른 사람들과의 연결을 유지하는 것, 이 두 가지 중 하나를 선택해야 하는 상황에 처해 있다. 이러한 상황에서 자신의 경험에 이름을 붙이는 것조차 많은 여성들에게는 어려운 일이다. 그렇기 때문에 의식 향상의 첫 번째 과제는 강간을 단지 강간이라는 그 실제 이름으로 부르는 데 있다.(123p)

-이들은 스스로를 위험에 빠뜨렸다거나, 제대로 저항하지 못했다면서 쓰디쓰게 자책한다. 그러나 이는 정확히 피해자를 비난하고 강간을 정당화하려는 강간범의 논박과 일치하는 것이다. 생존자는 자신이 무슨 행동을 했다고 해서 강간범의 범죄가 면죄되는 것은 아니라는 점을 명확히 이해해야 한다. 그래야만 생존자는 자신의 행동에 대한 온당한 평가에 도달할 수 있다.(125p)

-외상 경험을 다른 이들과 나누는 것은 세계가 의미 있다는 느낌을 회복하기 위한 필수 조건이다. 이 과정에서 생존자는 가장 가까운 이들과 보다 넓은 공동체에게서 도움을 찾는다. 공동체의 반응은 외상의 궁극적인 해결에 강력한 영향력을 행사한다. 외상을 경험한 사람과 공동체 사이의 간격을 메우는 일은 외상 사건에 대한 사회적 인정과 특정 형태의 공동체 활동에 의존한다. 사람이 해를 입었다는 사실이 사회적으로 인정되면, 공동체는 반드시 해악에 대한 책임을 분담하고, 상처를 치료하기 위한 행동을 취해야 한다. 인정recognition과 배상restitution이라는 이 두 가지 반응은 세계에는 질서가 있고 정의가 있다는 생존자의 느낌을 재건하는 데 꼭 필요하다.(127p)



-침투적인 외상후 증상을 유발하기 위한 체계를 고안하고자 한다면, 법정보다 더한 것은 없다. 법체계에서 정의를 추구하던 여성들은 대개 이러한 경험을 두 번째 강간에 비유한다.

대부분의 강간 피해자들은 정의를 다루는 사회적 기구가 자신들에게는 문을 열어 주지 않는다고 보고, 어떠한 신고나 호소도 하지 않는 쪽을 선택한다는 사실은 놀라운 일도 아니다. (...) 그러므로 여성에게 가장 흔하게 발생하는 외상은 사적인 삶의 영역에 갇힌 채로 남겨진다. 공동체의 공적인 인정이나 배상이란 없다. 강간 생존자들을 위한 사회적 기념비는 없는 것이다.

그러므로 치유의 과제 속에서, 각각의 생존자들은 너른 공동체와 연결되어 있다는 느낌을 복구하기 위한 자신만의 방법을 찾아야 한다. 얼마나 많은 이들이 이 과제에서 성공할 수 있었는지 우리는 알지 못한다. 그러나 회복에 성공한 여성들은 자신의 경험 안에서 사적인 비극의 한계를 넘어선 어떤 의미를 발견한 이들이라는 점을 우리는 알고 있다. (...) 숨거나 침묵에 대한 강요를 거부하고, 강간이 사회적 문제임을 주장하고, 사회적 변화를 요구하면서, 생존자들은 자신들만의 살아 있는 기념비를 창조한다. (132-133p)

 


-성인기에 반복적인 외상을 경험하게 되면 이미 형성된 성격 구조가 파괴된다. 그러나 아동기에 반복적인 외상을 경험하게 되면 성격이 단지 파괴되는 것만이 아니다. 이것은 성격을 만들어 낸다. 학대적인 환경 속에 갇힌 아이는 끔찍한 적응 과제들에 직면하게 된다. 아이는 믿을 수 없는 사람들 속에서 신뢰감을, 안전하지 않은 상황 속에서 안전함을, 끔찍하게 예측할 수 없는 상황 속에서 통제감을, 그리고 무기력한 상황 속에서 힘을 지키는 방법을 찾아야만 한다. 아이는 어른이 제공하지 못한 보살핌과 보호를 자신의 힘으로 보상해야 한다. 그러나 아이는 스스로를 보살피거나 보호하지 못한다. 아이가 가진 유일한 대처 방편은 심리적 방어라는 미성숙한 체계뿐이다.(169p)

-폭력, 위협, 그리고 규칙의 집요한 강요로 공포가 주입되고 자동적으로 복종하는 습관이 발달할 때, 보호를 제공할 수 있는 관계들은 고립, 은폐, 배신으로 파괴당한다. 아동 학대가 발생하는 가정이 사회적으로 고립되어 있다는 점은 잘 알려져 있다. 그러나 사회적 고립이 결코 자연스레 일어날 수 없다는 점은 알려져 있지 않다. 이는 사실을 은폐하고 가족 구성원들을 통제하기 위한 목적으로 가해자가 강요한 결과이다.(176p)

-학대받은 아이는 넓은 바깥세상뿐만 아니라, 가족의 다른 구성원과도 고립되어 있다. 아이는 자기 안의 세계에서 가장 힘이 센 어른이 자신에게 위험하다는 것은 물론, 보살필 책임이 있는 다른 어른들마저 자신을 보호하지 않는다는 것을 매일매일 인식한다. 보호할 수 없었다는 핑계는 아동 피해자에게 납득되지 않는다. 아이의 입장에서 이것은 좋게 보자면 무관심이고, 나쁘게 보자면 완전한 배신이다. (176p)

 


-지속적이고 반복적인 외상에 뒤따르는 증후군에는 그만의 이름이 필요하다. 필자는 복합성 외상후 스트레스 장애complex posttraumatic stress disorder”라는 이름을 제안한다. 외상에 대한 반응은 단일 장애의 범주로 분류하기보다는 연속적인 상태로 이해하는 것이 더 정확하다.(207p)

 


-옮긴이의 글 : 허먼의 치료 단계가 탄탄한 것은 그 안에 인간 내면에 남아 있는 힘을 긍정하고 인간의 연결이 결국 치유의 관건이라는 인간관과 세계관이 깃들어 있기 때문이다. 또한 허먼의 치료적 관점은 현재 한국 사회에서 피해자를 위한 지원 체계의 문제점을 해결해 갈 수 있는 안내가 될 수 있을 것이다. 허먼은 난파당한 것과 마찬가지인 피해자에게 제1순위의 지원에 해당되는 것이 바로 안전감의 회복이라고 지적한다. 그것은 물질적인 측면과 심리적인 측면 모두에 해당되며, 결국 환자 스스로 자기 삶을 통제할 수 있는 힘을 회복시켜주는 데 그 목표가 있다. 다음으로 외상 후 증상을 치료하기 위한 외상 재구성의 단계를 제안하며, 애도의 중요성을 짚어 낸다. 애도를 통하여 생존자는 회복의 책임이 자신에게 있음을 수용하고, 내면의 사랑하는 능력을 발견하여 마침내 완전한 힘의 회복에 이른다. 마지막 단계로 허먼은 연결의 복구를 제안한다. 생존자는 개인의 삶에서 사랑하는 사람들과 연결되고, 또한 다른 생존자들과 연결되고 생존자 임무를 완수하면서 사회적인 연결을 완성한다. 이로써 생존자는 개인의 건강을 회복하고, ‘복수가 아닌 정의 추구로 사회의 건강을 회복시킬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