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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뷰/도서

낸시 프레이저, 비판적 정의론, 재분배·인정·대표

낸시 프레이저 외, 케빈 올슨 엮음, 문현아 박건 이현재 옮김(2016), 불평등과 모욕을 넘어: 낸시 프레이저의 비판적 정의론과 논쟁들(Adding Insult to Injury), 그린비

이현재(2014), 여성 빈곤의 세 가지 측면: 문화적, 정치적, 경제적 빈곤-낸시 프레이저의 정의론을 중심으로, 한국여성철학 제21권


    (사진: 낸시 프레이저)



서문/ 케빈 올슨


"사실 오늘날의 진보 진영에는 진정한 부정의를 어떻게 극복할 것인가라는 점은 말할 것도 없고, 진정한 부정의가 무엇인지에 대해서도 별로 합의된 것이 없다. 어떤 이들은 성차별주의와 동성애 혐오라는 새로운 순열 조합을 강조하는 반면, 다른 이들은 식민주의와 제국주의라는 여전히 의미 있는 과거의 유산에 더 관심을 가지고 있다. 그리고 또 어떤 좌파 진영은 남반구에 만연한 산업적 착취를 강조하지만, 다른 진영은 공식적 노동으로부터 완전히 분리된 거대한 슬럼에 주목하고, 또 다른 이들은 포스트-산업주의, 포스트-평등주의, 포스트-복지 경제가 북반구 내에서 서로 다른 효과를 갖는 점에 주목한다.
적절한 접근 방식은 분명히 핵심적이면서 결정적인 현 시대의 불평등을 모두 포착해야 한다. 하지만 정의에 대한 어떤 생각이 이 모든 것을 포용할 수 있을 것인가? 어떤 개념이 투쟁의 자기 명료화와 이 시대의 희망이라는 비판적 이론화의 핵심 과업을 가장 잘 수행할 것인가?"

크게 두 진영으로 분류
1. 경제 불평등과 싸우는 데에 집중했던 진영은 재분배redistribution 패러다임 중시. 자본주의 체제가 야기하는 "손상injury"을 특히 중요시. 주로 계급 정치와 연관. 정의를 자원·기회·재화의 공정한 할당을 보장하는 것과 집중적으로 관련 지음.
공리주의자와 페이비언주의자, 진보주의자와 포퓰리스트, 공상적 사회주의자와 맑스주의자, 사회주의자와 사회민주주의자, 반제국주의자와 개발론자, 그리고 노동운동의 모든 분파가 이에 해당됨.

2. 가치가 폄하된 문화에 대한 낙인화stigmatization와 투쟁하는 데 더 큰 관심을 가졌던 진영은 차이에 민감한 인정recognition 패러다임 사용. 손상보다 "모욕insult"에 더 많은 관심. 기존의 경제 중심적인 사회적 사상을 문화주의적 사회 관점으로 대체하여, 사회를 불평등하게 가치평가된 정체성들이 상징적으로 정렬되는 행렬matrix로 파악. 그 결과 그동안 대체로 간과되었던, 잘못된 분배로 환원되지 않는 제도화된 경시의 형식들에 문제제기. 자신의 정체성, 생활 방식, 사회적 기여도를 폄하하는 것에 맞선 투쟁.
문화적 페미니스트, 다문화주의자, 그리고 퀴어 활동가 등이 이에 해당됨.

사회 정의에 대한 구상에서, 1은 평등주의적 구상, 2는 차이에 민감한 비판.
-> 낸시 프레이저는 일견 대립적이고 양립 불가능할 것 같은 두 진영의 생각을 융합, 재구성하려는 시도.

"(...) 정의론이 부족하지 않은 시대에 왜 이 작업[낸시 프레이저가 제시한 정의론]이 이렇게 넓은 반향을 일으키는지는 충분히 고려해 볼 만한 사안이다.
첫번째 이유는 프레이저가 더 생산적인 문제로 논쟁의 조건을 전환시키는 데 성공했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그녀는 '문화 정치'와 '사회민주주의'를 정반대의 것으로 대치시키는 무익한 양자택일에서, 어렵기는 하지만 더욱 생산적인 방식, 즉 양자 간에 긴장이 있다는 점을 인식하는 동시에 이러한 두 경향을 통합시키는 방식으로 논쟁의 조건을 전환시켰다.
두번째 이유는 현재의 혼란한 국면을 예측 가능하고 이해 가능한 것으로 만든 그녀의 예리한 능력 때문이다. 그녀의 틀은 정치적 풍경의 개요를 제공하고 있으며 외관 상 분리된 부정의들 사이의 점들을 연결한다. 그러면서 그 틀은 어떻게 하면 우리가 이질적이고 단편적인 투쟁에 그쳤을지도 모르는 그러한 투쟁들을 더 큰 그림에 연결하고, 서로 연결할 수 있을지를 고민하게 해준다.
끝으로 그리고 아마도 그래서 가장 중요하게 지적하고 싶은 점은, 프레이저의 이론화가 시간이 감에 따라 계속해서 깊어진다는 것이다. 논쟁과 대화를 매우 즐기는 사상가로서 그녀는 모든 비판적 의견 교환을 자신의 틀을 새로운 방향으로 확장하는 기회로 간주한다. 가장 최근에는 글로벌한 부정의를 분명히 하기 위해 그러한 의견 교환을 잘 활용하기도 했다. (...)"




1부/ 1장. 재분배에서 인정으로? 낸시 프레이저

            '포스트사회주의' 시대 정의의 딜레마


*재분배-인정 딜레마

-인정 주장은 종종 어떤 집단이 갖고 있다고 추정되는 특수성에 주목하고, 나아가 그 특수성의 가치를 긍정하는 형식을 띰. 따라서 이 주장은 집단의 분화differentiation을 촉진하는 경향. 

-반면, 재분배 주장은 집단 특수성을 유지시키는 경제 질서를 폐지할 것을 요청. 따라서 이러한 주장은 집단의 탈분화de-differention을 촉진하는 경향.

=> 문화 부정의와 경제 부정의 모두에 종속된 사람들은 인정과 재분배 모두를 요구함. 그렇다면 이들은 자신의 특수성을 주장하기도 하면서 부정하기도 해야 함. 이 풀기 어려운 딜레마를 '재분배-인정 딜레마'로 명명.



분배정의모델에 부합                                                                                                        인정모델에 부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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맑스주의적 피착취 계급                       젠더, 인종                   경멸받는 섹슈얼리티  e.g.동성애



*이가적bivalent 집단

-특정 집단이 사회-경제적으로 잘못된 분배와 문화적 무시 모두에 시달리면서 이 두 가지 부정의 중 어느 것도 다른 것의 간접 효과라고 할 수 없을 때(양자는 모두 일차적이며 동근원적), 이가적 집단이라고 부름. 이들이 집단적으로 차별받지 않기 위해서는 재분배 개선책 혹은 인정 개선책만으로는 충분치 않고, 양자 모두가 필요.

-대표적 사례: 젠더, 인종

-젠더의 경우:

"(...) 젠더는 정치경제 차원을 갖는다. 젠더는 정치경제의 기본적인 구조적 원리이다. 한편으로 젠더는 '생산적' 임금노동과 '재생산' 및 가사 노동과 같은 부불 노동을 근본적으로 구분하는 구조적 원리인데, 여기서 여성은 후자에 일차적인 책임을 갖는 것으로 여겨진다. 다른 한 편으로 젠더는 임금노동 내에서도 남성 지배적인 제조업 및 전문직 고소득 노동과 여성이 대다수인 '핑크칼라' 및 가사 서비스직 같은 저임금 직종을 구분하는 구조적 원리이기도 하다. 그 결과 젠더 특유의 착취·주변화·박탈 양식을 창출하는 정치-경제 구조가 만들어진다. 이 구조는 젠더를 계급과 유사한 어떤 특징을 갖는 정치-경제적 분화로 구성한다. 이러한 관점에서 보면 젠더 부정의는 재분배 개선책을 절실히 필요로 하는 일종의 분배 부정의로 나타난다. 계급만큼이나 젠더 정의는 그러한 젠더 구조화를 제거시키기 위해서 정치경제를 변혁할 것을 요구한다. 젠더 특유의 착취·주변화·박탈을 제거하기 위해서는 젠더 노동 분업을 폐기할 필요가 있다. 이러한 개선의 논리는 계급에서 나타나는 논리와 닮아 있다. 그것은 젠더 자체를 폐기한다. 요약하자면 만약 젠더가 정치-경제적 분화 이외에 다른 것이 아니라면, 정의는 젠더를 페기할 것을 요구하게 될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이야기의 절반일 뿐이다. 사실상 젠더는 정치-경제적 분화일 뿐 아니라 문화 평가적 분화이기도 하다. 마찬가지로 젠더는 계급보다는 섹슈얼리티와 더 유사한 요소들을 포함하며 이로 인해 정면으로 인정의 문제를 포함한다. 확실히 젠더 부정의의 주요 특징 중 하나는 남성 중심주의다. 남성성과 연계되어 있는 특징들에 특권을 부여하는 권위주의적 규범의 구성이 문제이다. 이를 통해 문화적 성차별이 나타난다. 즉 '여성적인 것'으로 전형적―전형적인 것만은 아니지만―여성으로 코드화된 것들에 대한 광범위한 평가절하와 비방이 문제가 된다.(물론 젠더 비방은 다양한 형태로 나타나는데, 여기에는 '여성성'의 품위를 손상시키기보다는 이를 찬미하는 것처럼 보이는 보수적인 전형도 포함된다.) 이러한 평가절하는 성폭력, 성적 착취 그리고 널리 퍼져 있는 가정 폭력 등 여성이 당하고 있는 광범위한 피해로 표현된다. 미디어에서 나타나는 왜소화, 대상화 그리고 품위를 손상시키는 전형화된 묘사를 보라. 일상 역역에서의 희롱과 비방도 그러하다. 남성 중심적 규범 아래서 여성은 모자라거나 비정상적인 것으로 나타나며, 이 규범은 차별하고자 하는 의도가 없을 때조차도 여성에게 불이익을 초래한다. 태도상의 차별도 있다. 공적 영역과 심의체에서의 배제 혹은 주변화도 있다. 온전한 법적 권리나 동등한 보호가 부정되는 경우도 있다. 이러한 손상은 인정 부정의다. 이것들은 정치경제와는 크게 상관이 없으며 단순한 '상부구조'가 아니다. 따라서 이러한 손상은 정치-경제적 재분배로만으로는 치유될 수 없으며 인정이라는 별도의 개선책을 요구한다. 남성 중심주의와 성차별주의의 극복은 남성성에 특권을 부여하고 여성에게 동등한 존중을 부여하지 않는 문화 평가(그리고 그것의 법적·실천적 표현들)를 변혁시킬 것을 요구한다. 그것은 남성 중심적인 규범을 해체하고 경멸받는 젠더의 가치를 재평가할 것을 요구한다. 이 개선책의 논리는 섹슈얼리티에서의 논리와 유사하다. 이것은 평가절하된 집단의 특수성에 긍정적 인정을 부여하는 것이다."




*부정의의 개선책: 긍정affirmation과 변혁transformation

-긍정적 개선책: 사회 질서의 불공정한 결과를 창출하는 근저의 틀은 손대지 않은 채 그 틀이 만들어 내는 결과를 교정하고자 하는 것

-변혁적 개선책: 근저에서 이를 발생시키는 틀을 재구조화함으로써 불공정한 결과를 교정하고자 하는 것.

-이 대조의 핵심은 결과의 최종 상태냐 아니면 이를 생산한 과정이냐에 있는 것이지, 점진적 변화냐 아니면 대대적인 변화냐에 있는 것이 아님



 

 긍정

변혁 

 재분배

 자유주의적 복지국가

-기존 집단에게 존재하는 재화를 표면적으로 재할당

-집단 분화 유지

-무시 창출 가능성 있음

 사회주의

-생산관계의 심층적 재구조화

-집단 분화의 희석화

-몇 가지 형식의 무시를 개선하도록 도울 수 있음

 인정

 주류 다문화주의

-기존 집단들의 기존 정체성에 대한 존중을 표면적으로 재할당

-집단 분화 유지

 해체주의

-인정 관계의 심층적 재구조화

-집단 분화의 탈안정화


-자유주의적 복지국가+해체주의, 사회주의+주류 다문화주의: 서로 반목하기 때문에 전망이 없어보임.

-자유주의적 복지국가+주류 다문화주의, 사회주의+해체주의: 양립 가능해보임. 


-젠더의 예를 통해 양립 가능해보이는 두 가지 방식을 검토하겠음:

긍정적affrimative 재분배와 긍정적 인정의 조합(즉, 자유주의적 복지국가+주류 다문화주의)

긍정적 재분배는 정치경제를 젠더화하는 심층 차원(젠더화된 임금/부불 노동의 구분 또는 임금노동 내에서의 젠더화된 남성적/여성적 직업 구분)을 건드리지 못하기 때문에 문제가 있음. 주로 태도상의 차별과 싸우는 것을 목적으로 하게 됨. 표면적인 재할당만을 계속. 이는 결과적으로 젠더 분화를 강조할 뿐만 아니라, 여성을 결함이 있고 만족을 모르는 존재로, 항상 더 많은 것을 요구하는 존재로 표시. 장기적으로는 특권화된 존재, 특별 대우와 과분한 부조의 수혜자로 비칠 수도 있음. 즉, 분배 부정의의 개선을 위한 긍정적 접근은 인정 부정의로의 반발을 초래할 수 있음.

여기에 긍정적 인정 전략을 추가하면 문제가 악화됨. 수행적performative인 방식으로 하지 않는다면, 여성적이라 추정되는 문화 특수성 혹은 차이에 주의를 집중하게 되기 쉬움. 이러한 접근이 몇몇 맥락에서는 남성 중심적 규범을 해체시키는 방향으로 진보를 만들어 낼 수 있겠지만, 이 맥락에서는 affirmative action에 대한 반발심을 심화할 것.

변혁적transformative 재분배와 변혁적 인정의 조합(즉, 사회주의+해체주의)

둘은 서로 충돌하지 않음. 변혁적 인정은 불공정하게 젠더화된 정치경제에서 발생하는 젠더 차이의 퇴적이나 응결을 반대함. 해체주의자들은 늘 새로운 정체성과 차이가 자유롭게 구성되고 나아가 유연하게 해체되는 문화를 유토피아적으로 그리는데, 이 유토피아적 문화는 어쨌든 대강의 사회적 평등의 기초 위에서만 가능.

긍정적 재분배와 긍정적 인정의 조합과 달리, 강한 반발에 부딪힐 위험도 적음.

다만, 해체주의 페미니즘의 문화 정치와 사회주의 페미니즘의 경제 정치가 현재 문화적으로 구성된 여성 대부분의 직접적 이해관계나 정체성에서 멀리 떨어져 있다는 것이 문제. 이러한 시나리오를 심리적·정치적으로 실현 가능한 것으로 만들기 위해서는 모든 사람이 현재의 문화적 구성과 결부된 자신의 이해관계와 정체성에 대한 애착에서 벗어날 필요가 있음.


=> 결론

"재분배-인정 딜레마는 현실적이다. 이 딜레마를 전적으로 해결하거나 해소할 수 있는 말끔한 이론의 방향은 없다. 우리가 할 수 있는 최선은 재분배와 인정이 동시에 추구되어야 하는 경우 양자 사이에 발생할 수 있는 갈등을 최소화하는 접근 방법을 발견함으로써 이 딜레마를 약화시키는 것이다.

내가 여기서 주장한 것은 젠더나 '인종' 같은 이가적 집단이, 적어도 이것들이 서로 분리된 것으로 생각된다면, 당면 딜레마를 해결하는 가장 최선의 방책은 사회주의적 경제와 해체주의적 문화 정치의 조합이라는 것이다. (...) "


근거

1. 젠더와 인종과 관련해서 제기했던 주장은 모든 이가적 집단에 적용됨. 계급과 섹슈얼리티조차도, 논의의 편의를 위해 지금까지 이념형적으로 다룬 것과 달리 실제 현실에서는 이가적인 것으로 드러나는 경우가 대부분임. 따라서 이중의 변혁적 접근 방식이 광범위한 불이익 집단의 선택 방향이 되어야.

2. 재분배-인정 딜레마는 단수의 이가적 집단에 내생적으로만 발생하는 것이 아님. 교차하는 집단들을 가로질러 외생적으로도 발생함. 게이이자 노동계급, 여성이자 흑인, etc. 이 딜레마 상황에서 긍정적 개선책의 조합을 통해 해결을 보려 한다면, 큰 저항에 직면함. 서로 상반된 목적을 갖기 쉽기 때문. 따라서 계급, 인종, 젠더, 섹슈얼리티의 교차는 변혁적 해결을 더욱 강하게 요구함.

3. 변혁적 개선책의 조합이 연합coalition의 형성을 가장 잘 촉진함. 정치경제와 문화 양자의 심층 구조를 변혁하는 프로젝트는 현재 진행 중인 부정의에 대항하는 모든 투쟁에 정의를 가져다줄 수 있는 유일한 포괄적 프로그램인 것으로 보임.




1부/ 5장. 왜 편견을 극복하는 것으로 충분하지 않은가. 낸시 프레이저

             리처드 로티에 대한 답변


*로티: 베트남 전쟁 이후 좌파가 이미 문화 혁명을 달성했으며, 인종적 소수자, 여성, 게이를 특징짓는 데 사용했던 낙인을 지워 버리는 것에 대체로 성공. 이제 필요한 것은 베트남 전쟁 이전의 좌파가 선호했던 옛 전략으로의 회귀. 문화보다는 경제에, 집단 차이보다는 공유된 인간성에 우선성을 두면서, 오늘날 사라지지 않고 남아 있는 편견에 계속해서 반대하면서 재분배를 강조해야. 즉, 재분배와 인정을 결합할 것이 아니라 '문화적 인정'이라는 생각을 버려야 한다는 것.

=> 낸시 프레이저의 반박:

"아래에서 나는 오늘날 좌파가 무엇을 해야 하는지에 대해 로티가 말한 결론을 반박하고자 한다. 한편으로 나는 인정을 특별하게 해석해서 사회 정의의 필수불가결한 차원으로 옹호할 것이다. 다른 한편 로티와 달리 나는 무시라는 주요한 부정의가 편견 그 자체를 제거한다고 해서 개선될 수 없음을 주장하고자 한다. 이런 방식으로 나는 인정 정치가 정치적으로 유용하며 도덕적으로도 진실로 요구된다는 점을 보여 주고 싶다. 재분배와의 결합을 통해 인정은 우리 시대 성공 가능한 좌파 정치의 근본 요소로 남게 될 것이다."



*인정의 정체성 모델에 대한 비판

-인정 정치 중 소외받는 집단의 독특한 문화적 정체성이라고 알려진 것을 정당화함으로써 이들 집단의 모욕적 재현에 대항하는 것을 목적으로 하는 모델.

-이런 종류의 인정 정치가 문제가 있다는 로티의 주장에 동의함.

-문제점은 크게 두 가지. 

1. 대체displacement의 문제: 무시를 독립적인 문화적 손해로 취급함으로써, 경제 불평등과 무시가 얽혀 있는 것을 모호하게 함. 재분배를 위한 투쟁과의 시너지 효과가 생기기는커녕 인정이 너무나도 쉽게 재분배를 대신함.

2. 물화reification의 문제: 집단 문화의 공고화를 추구함으로써 정체성을 본질화함. 개별 성원이 집단 문화에 순응하도록 압력을 가하며, 그들 삶의 복잡성, 그들 정체화의 다층성, 그리고 그들 사이의 다양한 제휴의 교차성을 거부. 차이들을 가로지르는 상호작용을 증진하기는커녕 분리주의와 억압적 공동체주의를 촉진하는 방식으로 집단 정체성을 물화하고 공유된 인간성이라는 쟁점을 도외시.



*해결책 제안: 인정 정치의 재구성―"지위 모델"

-지위status의 관점에서 인정을 재해석: 인정을 요구하는 것은 집단에 특수한 정체성이 아니라 사회적으로 상호작용하는 온전한 파트너로서의 개별 집단의 성원의 지위. 따라서 무시는 집단 정체성의 비하가 아니라, 사회 생활에 동료로 참여하는 것을 거부당한다는 의미의 사회적 종속을 의미.

=> 이 부정의를 교정하기 위해서는 인정 정치가 요구되지만, 이것이 정체성 정치는 아님. 지위 모델에서 정치는 오히려 참여 동등을 방해하는 문화 가치 패턴들을 탈제도화하고, 그 패턴들을 참여 동등을 촉진하는 패턴들로 대체함으로써 종속을 극복하는 것을 목적으로 함.

e.g. 동성 파트너십을 불법적이고 변태적인 것으로 결혼에서 제외시키는 혼인법, 싱글맘을 성적으로 무책임한 식객 정도로 낙인찍는 사회복지 정책, 인종적 특징을 가진 사람을 범죄와 연관시키는 인종 프로파일링...


1. 지위 모델은 로티의 교섭 거부주의rejectionism과는 달리, 인정이라는 아기를 정체성 정치라는 목욕물과 함께 버리는 것을 피하게 해준다.

2. 이 접근은 재분배 정치를 대체하기보단, 제도화된 문화 가치 패턴이 참여 동등을 가로막는 유일한 장애물이 아님을 인식. 재분배도 동등한 참여를 방해하기 때문에 심각한 부정의라는 결론에 다다르게 될 것.

3. 지위 모델은 집단 정체성의 물화를 조장하지도 않음. 목적은 가능한 한 최대 범위로 사회적 상호작용을 증진시키는 것. 따라서 특수성이 제대로 인식되지 않아 동등을 가로막는 장애물이 되는 경우에만 부정의를 교정하기 위해 집단 차이가 긍정됨. 게다가 참여 동등이라는 생각은 공공 영역에서 인정 요구를 시험하는 데 있어 정당한 기준으로 작용할 수 있음. 본질적으로 대화적이고 민주적인 접근이기 때문에, 정체성 정치가 갖는 독백적이고 권위적 특성, 때때로 문화적 진본에 호소하는 것을 거부.



*'편견의 극복'만으로는 충분치 않다

-로티는 1.1960년대에 시작된 문화 혁명 덕분에 모든 무시가 제거되었고, 2. 그렇지 않더라도 남아 있는 무시가 재분배 정치에 의해 교정 가능하고, 3. 재분배만으로는 잔존하는 모든 무시를 폐지하기 충분치 않더라도, 편견을 제거하는 것을 목적으로 하는 익숙한 자유주의적 개혁에 의해 그런 결과가 성취될 수 있다.


-1에 대해: 유토피아적 공상의 수준임. 문화적 측면에 내재된 불평등한 제도화와 그에 맞서는 강력한 대항적 경향들을 간과.

-2에 대해: 천박한 경제 결정론. 현재 자본주의 사회가 고도로 분화된 성격을 갖고 있음을 고려하지 못함.

-3에 대해: 유일하게 진지하게 고려할 만함. => 그러나 대답은 "아니오."



근거

1. 무시는 주로 편견을 통해서만 공급되는 것이 아니기 때문. 무시는 동등을 방해하는 규범에 따라 사회적 상호작용을 규제하는 제도와 실천을 통해 전달됨. 이러한 제도와 실천은 종종 의식의 범위 밑에서 작동하기 때문에, 제도와 실천을 변화시키기 위한 노력만이 부정의를 개선할 수 있음.

2. 모든 무시가 공통적인 인간성을 거부하기 때문에 발생하는 것은 아니기 때문. 어떤 경우에 부정의는 집단 차이를 인식하지 못해서 발생함. 

e.g.출산 휴가를 제공하지 않은 고용주가 성차별에 해당하지 않는다는 미 법원의 결정('남성에게 그에 상응하는 혜택이 없었으므로'라는 성맹적 관점에서 내린 결정임), 일반적 남성 평균에 해당하는 신장을 가진 사람을 위해 제작된 사다리에서의 등판 속도를 기준으로 한 소방관 구직 절차, 캐나다에서 기마 경관에서 의무적으로 제복 모자를 착용하도록 함으로써 독실한 시크교도의 직업 기회 차단...

이는 로티가 제안한 것과 같이 모두가 공유하는 것을 강조한다고 개선될 수 있는 부정의가 아님. 차이를 고려하지 않는 규범을 차이를 수용하는 대안으로 교체해야만 참여 동등을 확립할 수 있음. 즉, "정의는 때로 차이의 인정을 요구한다. / 집단 차이의 인정은 때때로 공통적인 인간성의 존중을 확증하는 데 필요하게 된다."

3. 인정과 연관된 차이가 가지고 올 위험성에 대해서는, 차이에 무지한 보편주의로 퇴각할 것이 아니라 오히려 다른 것을 추가해야 함. "해체." 해제는 물화하고자 하는 경향들에 반작용하도록 도와주는 인정의 층위.

해체주의는 또한 정치적으로 유용할 수 있음. 소수만 이해하는 학문적인 철학이 아니라 지위 종속을 치유하는 다면적 전략의 한 요소로 이해되기 때문. 예를 들어, 무시가 강제적 분류 체계로부터 발생하는 경우. e.g.동성애자/이성애자 이분법, 흑인/백인 이분법. 

=> 목표는 인정 개선책을 무시 손해misrecognition harm에 맞춰 조정하는 것이 되어야 한다. 즉 필요한 곳에서는 보편적 존중을 차이와 관련된 존경으로 보충하고, 우연적 타당성 이상의 것을 요구하는 모든 분류 체계에 대한 해체적 회의주의라는 건전한 처방을 추가해야. 이는 로티의 주장보다 더 일관되게 실용적이며, 현재 참여 동등을 가로막는 모든 범위의 장애물을 제거할 유일한 방법.



"이 모든 이유로 나는 좌파가 시계를 되돌리려는 로티의 제안을 거절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베트남 전쟁 이전의 좌파 전략으로 회귀하는 대신에 좌파는 지난 40년간의 성과를 기반으로 해야 한다. 왜냐하면 이러한 성과가 사회 정의의 의미를 확대하고 심화했기 때문이다. 이런 식으로 좌파는 인정 정치를 포기하기는커녕 지위 종속을 극복하고 참여 등등을 발전시키는 것을 목적으로 하는 인정 정치 입장을 채택해야 한다. 이런 방식으로 집단 정체성들의 물화와 재분배 투쟁의 대체를 회피하는 것을 포함하여 성공적으로 정체성 정치의 함정을 피할 수 있다. 이와 똑같이 중요한 것은, 이러한 것이 현재 내부 논쟁에 버려지고 있는 에너지를 생산적인 방식으로 되살릴 수 있고, 작금에 요구되는 어려운 과제에 집중할 수 있게 해준다는 점이다. 다시 말하자면 향후 가속화된 지구화 시대에 부정의에 대항한 싸움을 이끌 적절한 좌파적 전망 속에서 인정과 재분배를 통합해야 한다는 것이다."




정치적 차원의 부정의에 대하여


-정치적 부정의: "대표representation"의 문제. 누가 동등한 상호작용에 참여할 것인가? 어떻게 그들의 목소리를 내는 절차를 마련할 것인가?

이때의 '정치'는 협의의 의미. 국가의 사법권의 범위, 국가가 논쟁들을 구조화할 수 있게 해주는 의사결정 규칙들과 관련된 것을 지칭함.


-이에 대한 프레이저의 입장은 변화를 겪음. 

1. 정체성 정치의 시대의 사회정의(2003)에서: 문화적 정의와 경제적 정의는 "참여 동격participation parity"이라는 정치적 정의를 실현하기 위한 두 개의 조건. 물질적 자원의 분배는 객관적인 조건, 문화적 가치에 대한 동등한 존중은 상호주관적인 조건. 정치적 정의는 이 두 차원을 매개하는 차원임.

2. 지구화 시대의 정의(2008)에서: 정치적 차원을 그 자체의 독자적인 논리를 갖는 세 번째 차원으로 명시화. 




*3가적 집단으로서의 여성 (이현재)

-여성의 경제적 빈곤(잘못된 분배): 착취, 경제적 주변화, 박탈

-여성의 문화적 빈곤(무시): 여성 정체성의 비하, 왜곡, 무시, 경멸, 종속 -> 여성의 자아존중감 손상

-여성의 정치적 빈곤(대표 불능): 정치적 과정의 주체로 참여하지 못하고, 정치적 상호작용의 절차(남성중심적 형식)에 목소리를 내도 담기지 않음



*빈곤 치유를 위한 잘못된 개념들: 안티테제, 환원주의

*복합적 빈곤 치유를 위한 개념틀 다시 짜기(reframing): 지위 모델과 변혁적 개선책


*프레이저의 reframing 보완 (이현재)

1. 형식주의 경계하기: 

참여 동격이라는 정치적 형식의 우선성은 인정의 내용을 소홀하게 만들 위험성. 정치적 상호작용은 그 형식과 내용 모두에 있어서 고려될 필요가 있다고 주장해야. 해체와 동시에 정체성의 재구성에도 소홀해선 안 됨.

또한, 정치적 상호작용의 형식이 남성중심적일 수 있음에 주의해야 함. 여성적인 목소리가 들릴 수 있는 내용이 담긴 상호작용의 형식 고민해야.

2. 해체주의의 한계 극복하기:

해체적인 해결책은 이미 기존의 경제구조와 가치패턴에 갇혀있는 해당 집단에게 매력적으로 다가가지 않을 가능성이 높음(운동성 이끌어내는 데에 실패). 따라서 변혁이 먼 미래의 유토피아가 아닌, 지금, 여기서, 해당 개인이 혹은 해당 집단이 이미 어느 정도 수행하고 있는 일임을 개념적으로 밝혀주는 작업이 변혁적 치유책에 스며들어가야. ex.깁슨-그레엄의 정치경제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