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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평

구교환, 꿈의 제인 인간은 무엇으로 사는가. 경계 바깥의 삶들에게는 허락되지 않는 안정된 기반, 세상에의 신뢰라든지 미래에의 전망 따위 것들은 그 위에서만 가능한 것이다. 말라붙어 가는 자신의 존재를 지키기 위해 영화 속 주인공 소현이 붙잡은 것은 이야기였다. 꿈 같은 이야기. 사실과는 다르지만 진실을 담고 있는 논/픽션. 그러나 나는 소현이 만든 꿈에 가슴이 시리었다. 스쳐지나갔을 뿐인 인연들을 중요한 등장인물로 배치시키고, 이야기의 서문과 결말을 모두 타인에게 들은 말로 채워낸 그 공허함이. 삶을 간신히 지탱하고 있는 환상 안에서조차 제인이 스스로 목숨을 끊어내는 깊이 모를 절망이. 아마도 유서였을 소현의 이야기가 누군가에게 들리게 되었다면. 이 서툰 아이는, 시신 유기한 장소를 다그침받는 상황에서조차 "니 이야기 말고.. 더보기
우리들 인사, 칭찬, 선물. 그리고 웃음. '네가 좋아, 우리 친해지자' 하는 이 투박한 손 내밀기에, 나이가 든 만큼 매끈해진 소셜스킬-그 원활하고 점잖은 상호작용 망 속에서 영위되던 내 일상에 파문이 일었다. 결핍에, 부러움에, 불안함에 휘청거리면서도, 상대방에 대한 호감과 사랑받고 싶단 마음을 숨기지 못하는 나이가 이토록 예뻤던가. 지나오기 전에는 미처 몰랐다.무엇보다 이 영화의 압권은 윤이의 "그럼 언제 놀아?"라는 명대사일 것이다. 옳고그름과 형평을 따지는 정의justice의 논리를 잠시 억압해두고 상대방이 나에게 가지는 주관적 의미를 생각할 때, 관계relationship가 시작된다는 것. 내가 성인이 되고도 좀처럼 깨닫지 못했던 이 명제를 세 단어로 압축해낸 촌철살인. 2017.5.5. 더보기
이창동, 시 "사람들은 시에 대해 양가감정을 느낀다. "왜요, 시 쓰시게요?" 대견하지만 한심하다는 뉘앙스. 아름다움을 다루는 고상한 일이지만 그곳은 삶의 참혹한 실상과는 무관한 세계가 아닌가 하는 감정. 그리고 저 학생[주인공 미자]과 교사는 그런 통념에 착실히 부합한다. 아직까지 그녀에게 시를 배운다는 것은 거실에 그럴듯한 화분 하나 갖다놓는 일과 다르지 않다. 시 한 편 써오르는 숙제를 받고는 사과를 만져보고 나무 그늘에 앉아보지만 그것은 오로지 자기 삶을 들여다보지 않기 위해서 할 만한 일들이다. 손자가 집단 성폭행에 가담해 한 소녀를 죽게 만들었다는 사실을 다른 학부형들을 통해 알게 되는 자리에서도 아직은 그랬다. 충격적인 사실을 듣고 그녀는 그 자리를 피하고 꽃의 아름다움으로 숨어버렸으니까. 그러나 상황은.. 더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