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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망/내면

한강, 유월

유월

한강



그러나 희망은 병균 같았다
유채꽃 만발하던 뒤안길에는
빗발이 쓰러뜨린 풀잎, 풀잎들 몸
못 일으키고
얼얼한 것은 가슴만이 아니었다
발바닥만이 아니었다
밤새 앓아 정든 위장도 아니었다
무엇이 나를 걷게 했는가, 무엇이
내 발에 신을 신기고
등을 떠밀고
맥없이 엎어진 나를
일으켜 세웠는가 깨무는
혀끝을 감싸주었는가
비틀거리는 것은 햇빛이 아니었다,
아름다워라 산천, 빛나는
물살도 아니었다
무엇이 내 속에 앓고 있는가, 무엇이 끝끝내
떠나지 않는가 내 몸은
숙주이니, 병들 대로 병들면
떠나려는가
발을 멈추면
휘청거려도 내 발 대지에 묶어줄
너, 홀씨 흔들리는 꽃들 있었다
거기 피어 있었다
살아라, 살아서
살아 있음을 말하라
나는 귀를 막았지만
귀로 들리는 음성이 아니었다 귀로
막을 수 있는 노래가
아니었다

_

하루에 여러 건이 터진 오늘 같은 날에는, 아름다운 사람들이 끝없는 절망과 환멸에 집어삼켜지는 모습을 보게 된다. 비관적인 전망을 뒷받침할 근거가 넘쳐나고 쇄도하는 혐오 폭력 차별이 정신차리고 서 있기도 힘들게 하는 곳에서, 변화에의 믿음을 부여잡는 것이 얼마나한 과제이던가. 바닥까지 고갈되어 쓰러졌을 때에는 함께, 라는 빛나던 말조차 부채감의 원천이 되는 곳에서 무엇이 다시 일어설 힘이 되는가.
근본적인, 아주 근본적인 차원에서의 희망이나 신뢰, 믿음에 대해 생각한다. 세상은 쉽게 바뀌지 않지만 언젠가 바뀌고야 만다는, 모든 터널에는 출구가 있고, 그 무엇도 지나가기 마련이라는, 막연한 믿음이 한 인간을 옭아매면서 동시에 지탱하는 방식에 대해 생각한다. 실증적 비판 앞에 무력한 그러한 믿음이, 또 비틀비틀 심지를 곧게 세우는 과정에 대해 생각한다.
나는 막을 수 없는 노래를 따라부르기로 했다. 병균 같이 번지는 희망에 적극적으로 몸을 담뿍 담그기로 했다. 싸우기보다는 걷기로 했다. 길 끝에 있는 것을 믿고 사랑하면서 이 여정의 의미가 종착지에 도달하는 것에 있지 않음을 새기기로 했다. 당신이 당신의 길을 걷는 데에 나는 어떠한 실질적인 도움도 줄 수 없다. 다만 떠밀려 다시 일어나 걷다가 옆을 돌아보면, 휘청거리며 끝내 걸어갈 또 다른 사람이 되겠다. 이제는 그위치를 필요로 하는게 아니라 내가 그 위치에 있겠다. 아름다운 사람들, 당신들을 사랑하면서 힘들지 않길 바라지도 못하는 나는 이것으로.


2017.8.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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