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전망/내면

피해자의 윤리적 고통

(그림: 조르주 부르주아의 작품)


1.

죄없는 자들의 고통에 대해 생각한다. 

납득할 이유도 복선도 없이 밀고들어와 압도해버리는 아픔이  있다. 찢기고 깨지고 너덜너덜 허는 듯한 생생한 감각, 명확한 이유를 찾지 못하겠으나 '불운' '우연' 따위의 단어로 덮히지 않는 혼란은 언어적 묘사가능범위를 초월해있는 무언가이다. 그러나 이러한 설명의 부재, 그 결핍감이 의미를 찾고자 하는 원동력이 될 것이다. 매일의 삶을 지탱해주는, 외부로부터 주어진 얄팍한 의미가 이들에게는 산산히 부서져있으므로. 의미 없이 생존할 수 없다면 스스로 찾는 수밖에 없으므로.

그러나 이들의 시도는 거의 항상 실패한다. 한 인간으로서 짊어지기에 버거운 임무였기 때문이라 생각한다. 무너지고 부서지고 주저앉는다. 의지가 될것같은, 그러나 실은 그럴수없는 것이라는 것을 스스로도 내심으론 아는, 얄팍한 것을 움켜잡으려 애쓴다. 그리고 예정된 허무를 맛본다.

이런 삶을 더 나은 것이라 옹호할 수 있을까? 

모르겠다. 다만 선택의 문제가 아니라는 것만을 안다.

(2016.10.19)



2.

가장 잔인한 것은 가해의 가벼움과 피해의 무거움 사이의 간극일 것이다. 가해자도 가해 그 자체도 아니다.
.
그의 죄는 작고 나의 상처는 파괴적이다. 수많은 피해자들의 자책은 이로부터 비롯되리라. 상처의 고통에 상응하는 분노와 원망을 품으면 그것은 언제나 그의 죄를 훌쩍 상회하기에. 윤리성이 스스로를 옭아맨다. 나의 분노는 과하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정의롭지 않기 때문이다. 내가 나에게 붙여줄 이름에, 자신의 고통경감을 위해 타인을 부당하게 공격하는 이기주의자 혹은 별거 아닌 일에 큰 상처 받은 예민하고 나약한 자 밖에는 없어지기 때문이다. 이기주의자도, 자기 고통에의 연민에 빠진 자도 되지 않으려면 스스로의 욕구를 외면하고 감정을 부인해야 하기 때문이다. 나는 그렇게 나에게 가혹해졌다.
.
죄없이 고통에 처해진 이들이 고통의 구렁텅이에서 벗어나려고 애를 쓸 때, 이렇듯 윤리는 저 간극을 통해 이들을 벌한다. 그래서 나는 윤리가 이들의 관점에서 재구성되어야 한다고 믿었다, 여전히 믿는다, 그러나. 고통의 한복판에서 지금까지 세상에 없었던 무언가를 만들어내야 할 무거운 과업까지 떠안고 나아가는 자들은 무엇에 기댈 수 있는가. 윤리가, 옳음이 나의 투쟁대상이어서 나를 정당화시켜주지 않는다면 나는 투쟁하는 나의 결정을 어떻게 설명해야 하는가.
.
나는 실존적 차원으로 도피하려 했다. 운명이나 사명, 임무, 소명 같은 말들에 기대려 했다. 종교를 믿을 수 있었다면 그곳에서 찾았을 지도 모른다. 이 시도는 도움이 됐다. 덜 고통스럽고 덜 혼란스럽고 먼 곳을 볼 수 있게 되었다. 그러나 이 선택은 실존이라는 것이 으레 그렇다는 듯이 당연한 외로움을 던져주었다.
.
삶이 무겁다.

(2016.11.28)

'전망 > 내면' 카테고리의 다른 글

한강, 유월  (0) 2018.03.20
한강, 서시  (0) 2018.03.19
未忘 혹은 備忘 14  (0) 2016.09.16
나쁜 기억을 잊는 법  (0) 2016.07.06
  (0) 2016.06.1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