샌드라 하딩 지음, 조주현 옮김, 「누구의 과학이며 누구의 지식인가: 여성들의 삶에서 생각하기」, 나남, 2009
(Sandra Harding, 「Whose Science? Whose Knowledge?: Thinking from Women's Lives」, 1991)
1. "자연과학의 가치중립적 객관성"이라는, 거짓된 신념에 대한 비판
-과학분야 내 여성들의 숫자가 적고, 그 적은 수의 여성들조차 고투해야만 했을 뿐 아니라,
-과학과 기술은 오랫동안 성차별적인 방식으로 남용되고 오용되어 왔으며(ex.재생산기술이 여성의 건강을 남성의 건강보다 훨씬 경시하고, 여성이 스스로의 몸에 대해 주도권을 가지기 어려운 방식으로 개발되어 왔다는 사실),
-성차별적이고 남성 중심적인 편견에 의해 "발견의 맥락"과 "정당화의 맥락" 모두에서 편향이 있고(ex.연구자금이 지원되는 분야의 연구결과들만 많아짐, '정보'라고 인정받을 수 있는 종류의 발견이 정해져 있음),
-과학 언어들조차도 성차별주의에 깊이 침윤되어 있다(ex.자연과 탐구에 대한 성적 은유들).
-남성중심적인 인식론들 또한 지적됨:
"마지막으로, 자연과학과 사회과학에 이의를 제기했던 지금까지의 논의들에서 등장하는 것이 인식론적 쟁점들이다. 여기서 이 문제를 정식화할 수 있는 한 방식은 인문학, 생물학, 사회과학의 경우, 이 학문들의 토대에 대한 문제제기 없이 "여성을 첨가"하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점이 드러났다는 것에 주목하는 것이다. 마찬가지로, 페미니스트 과학비평은 우리가 전통적인 지식론 안에 인식주체로서의 "여성을 첨가"하려고 할 때, 우리는 즉시 그 전통이론들이 얼마나 편파적이고 왜곡되어 있는지를 알게 된다고 주장한다.
쟁점은 개별 여성들이 과학적 훈련과 자격을 부여 받았는가 그리고 지식의 발전에 중요한 기여를 하였는가에 있지 않다. 수많은 여성들이 이미 그렇게 했다. 페미니스트 인식론 비평의 쟁점은 다른 데 있다. "인식 주체로서의 여성"이라는 말은 ("여성과학자"의 경우처럼)모순된 용어로 보인다. "인식 주체로서의 여성"이란 지식의 행위자로서의 여성, 역사의 무대에서 행동하는 여성, 인간으로서 그 삶이 지배집단 남성들의 삶에 근거한 지식 주장과 다를 뿐만 아니라 어떤 면에서 더 나은 지식 주장의 근거가 되는 여성을 말한다.
우리가 관습적으로 과학적이라고 할 때의 의미는 내정하고, 사심이 없으며, 추상적 원리와 규칙에 관심이 있다는 걸 뜻하는 데 비해, 여성이라고 할 때의 의미는 감정적이고, 가족과 친구들의 복지에 관심이 있고 편파적이며, 구체적인 실천과 맥락의존적인 관계에 관심이 있는 것을 뜻한다는 것을 알게 될 때 모순을 감지할 수 있다. 페미니스트들은 이러한 여성성의 특징들은 생물학의 결과가―하급 생물학의 결과는 말할 것도 없고―아니라고 주장한다. 오히려, 이런 특징들은 지배집단 남성들의 삶보다는 여성들의 삶의 특성을 더 잘 나타내는 다양한 사회적 조건들로부터 나온다. 한 가지 이론은 지배집단 남성들이 그들 자신은 하고 싶어 하지 않는 어떤 종류의 인간 활동을 여성들에게 (그리고 다른 주변적 위치에 있는 사람들에게) 배정한다는 것이다. 그들은 여성들에게 남성들의 몸을 포함하여, 모든 몸과 그 몸이 거주하는 각각의 장소들을(집, 사무실 등) 돌보고, 어린아이들을 돌보며, "감정노동"―남성들과 모든 다른 사람들의 감정을 정리함―을 할 것을 명한다(몇몇 남성들은 정신과의사로서 감정노동의 대가로 진료비를 청구할 수 있을 때만 감정노동을 할 것이다). 간단히 말해서, 대부분의 지배집단 남성들은 그들 자신의 일이든 다른 사람의 일이든, 매일의 삶에서 해야 할 일들을 담당하려하지 않는다. 여성들은 문화가 인정할 수 있는 지식을 생산하기 위해 자신들의 매일의 삶의 관점에서 알 수 있는 자연과 사회관계들에 대한 것들을 포기해야 하는가? 지배적인 인식론이 진정한 지식은 초월적이므로 위치지어진 지식(situated knowledge)이라는 생각 자체가 모순적인 용어라고 생각할 때, 그런 사회적으로 위치지어진 지식(socially situated knowledge)은 어떻게 정당화될 수 있는가?" (p.92-94)
-인간에 대한 연구인 사회과학과 달리, 자연과학, 최소한 순수자연과학은 이 같은 비판이 해당되지 않는 것이라는 믿음이 퍼져 있으나, 이는 사실이 아님.
2. 페미니스트 경험론, 페미니스트 입장론
“사회과학과 생물학의 개념체계와 객관성, 합리성, 과학적 연구방법에 관한 지배적 견해들은 어떤 방식으로든 너무 불충분하거나 왜곡되어서 그 지식체계로는 성차별적이고 남성 중심적인 가설들과 신념들을 지적하는 일 ― 제거하는 일은 고사하고 ― 조차 가능하지 않았다. 여성과 젠더와 같은 중요한 주제들을 그렇게 체계적으로 왜곡시켜 놓은 개념체계들과 연구모델들을 받아들인 상태에서 어떻게 연구자가 여성 생물학이나 여성들의 삶을 제대로 기술하고 설명할 수 있겠는가? (...) 게다가 성차별주의와 남성중심주의를 지적하고 비판하는 것을 가능하게 했던 페미니스트 관점에 대해 대부분의 과학자들은 그 관점을 (이성과 관찰과 대립되는) 정치로 간주하였고, 페미니스트 관점이 자연과 사회관계들의 저변에 깔려 있는 인과적 경향과 규칙성들을 “순수하게” 기술하고 설명하려는 자신들의 목표를 위협한다고 생각했다.“ (p.167)
“즉 근대 서구사회에서 여성들과 지식 ― 사회적으로 합법화된 지식 ― 개념은 서로 대립적인 것으로 구성되어 왔다는 것이다. 여성들에게는 결코 단 한 번도 여성들 자신이 처한 상황이나 누군가 다른 사람이 처한 상황에 대해 진술하거나 그런 상황들을 어떻게 변화시켜야 할지를 주장하는 데 필요한 권위의 목소리가 부여된 적이 없었다. 결코 단 한 번도 여성들의 삶의 관점에서 제기된 질문을 통해 생성된 사회적 지식이 보편적인 지식으로 간주된 적이 없었다.” (p.168)
-페미니스트 경험론:
성차별적이고 남성중심적인 연구결과는 단순히 "나쁜 과학"의 결과라고 주장. 그렇기 때문에 해결책으로서, 과학적 탐구에 관한 전통적 방법론의 규범을 좀더 엄격하게 지킴으로써 성차별적 편견들을 제거하기를 제시. (많은 경우 스스로를 '페미니스트 경험론자'라고 지칭하지 않고, 단순히 엄격한 과학적 방법론을 추구하는 과학자로 정체화함.)
-페미니스트 입장론:
과학적 지식이론의 문제점은 좀더 대규모적이라고 주장. 의견뿐 아니라 한 문화의 제일 신뢰받는 신념―그 문화가 지식이라고 부르는―들까지도 사회적 상황 안에 놓여 있기 때문에, 자연과학과 사회과학의 지배적인 개념틀은 서구 엘리트계급과 인종의 남성들이 자신들의 경험과 자기 주변세계의 경험을 설명하는 데 어울리는 것. 대안은 성별 위계화된 사회 속에 있는 여성들의 상황의 특징을 새로운 페미니스트 연구의 자원으로 활용하는 것. 전통 연구자들이 사용하지 않는 이런 특이한 자원들 때문에 바로 페미니즘이 전통적 연구보다 경험적으로 더 정확한 기술과 이론적으로 더 풍부한 해명을 할 수 있음.
“이러한 정당화 접근법은 주인과 노예 간의 관계에 대한 헤겔의 통찰과 직관을 프롤레타리아적 관점으로 발전시킨 맑스와 엥겔스, 루카치의 업적에서 유래한 것이다. 그 논지는 인간의 활동 또는 물적 생활은 인간의 인식을 구조화시킬 뿐만 아니라 제약하기까지 한다는 것이다.” (p.187)
-> 그러나 하딩은 소박한 경험주의적 태도를 옹호하는 것이 아님. 여성의 삶에서 시작하되, 경험이나 말보다 고차원적으로 정제되고 검증받은 고찰과 이론이어야 한다는 것.
“어떤 태도가 그저 여성들이 그들의 삶과 경험에 대해 말하는 것을 듣는 것의 중요성에 대한 주장 ― 마찬가지로 값진 것이긴 하나 그것은 다른 이유 때문이다 ― 에 머무르지 않고 하나의 입장으로 받아들여지려면 우리는 객관적 위치 ― 여성들의 삶 ―를 페미니스트 연구가 출발해야 할 그 지점이라고 주장해야 한다. (...) 페미니스트 주장들의 근거를 제공하는 것은 경험이나 말이 아니다. 그보다는 곧 이어서 명료하게 정리된, 자연과 사회적 관계들의 나머지 부분에 대한, 고찰과 이론 ― 여성들의 삶에서 출발해서 그 시점으로 세상을 살피는 그런 관찰들과 이론 ― 이다. 그러면 누가 이런 “출발”을 맡아야 하는가? 이런 질문을 던지자마자 지식탐구가 가능하려면 민주적인 참여 정치가 필수적이라는 것이 분명해진다. 그렇지 않으면 지식탐구를 위한 연구기관들을 장악하고 있는 지배적 젠더, 인종, 섹슈얼리티, 계층의 엘리트들만이 그들의 연구들에서 어떤 질문들을 물을 것인가를 결정할 기회를 가질 것이다. 우리는 실제로 그런 질문들이 나온 바로 그 역사적 위치에 의문을 제시할 권리가 있다. 여성들의 경험과 말을 중요시하면서 동시에 페미니스트 지식 창출에서 그것들의 정확한 역할을 명확하게 규정하는 것이 중요하다.” (p.192)
3. "강한" 객관성
(1) 가치중립적 객관성 비판
“자연과학의 역사상 가장 최악의 경우뿐 아니라 가장 최선의 경우에도, 그것은 정치적 욕망들, 이해관계들, 가치들에 의해 형성되었다―혹은, 좀더 정확하게 말하자면, 그것들 안에서 그것들을 통해 구성되었다. 따라서 연구의 객관성은 모든 정치적 가치들과 이해관계들을 연구과정에서 제거함으로써 확보될 수 있다는, 그런 주장을 옹호할 수 있는 근거는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 것으로 보인다. 그 대신 과학은 과학 공동체 안에 너무나 보편적으로 공유되어 있고 이러 저런 연구영역들의 구성 그 자체에 투입되어 있기 때문에 실험자들이나 연구 공동체들 사이에 문화적 편견으로 보일 가능성이 전혀 없는, 그런 역사적 가치들과 이해관계들을 과학적 연구 안에서 비판적으로 검토하는 것을 과학 실천의 한 부분으로 정당화할 수 있어야 한다.” (p.223)
(2) 상대주의 비판
“역사적으로, 상대주의는 지배집단의 견해의 주도권이 도전받을 때 오직 그 지배집단을 위한 하나의 문제적인 지적 가능성으로 등장한다. 사실상 서로 다른 문화들은 서로 다른 신념들, 가치들, 판단 기준들을 갖는다는 인식은 인간의 역사만큼 오래된 것이지만, 도덕적 판단의 상대주의는 유럽에서는 19세기에 이르러서야, 기이하게 보이는 타자들의 신념들과 행위들이 그 자체의 합리성과 논리를 가졌다는 때늦은 인식과 함께, 긴급한 지적 쟁점으로 부상했다. (...) 여기서 상대주의는 남성들의 삶의 관점에서만 문제로 부상한다. 실제로 어떤 남성들은 자신들의 전통적인 남성 중심적 신념과 그 신념의 합리적인 결과로 보이는 실천들 중 어느 하나도 포기하지 않으면서 자신들이 페미니스트 주장들을 인정하고 받아들이는 사람으로 보이고 싶어한다. “모든 것은 다 상대적인 것이지요”라는 표현은 이 두 목표를 모두 달성하기 위한 편리한 방식이다.” (p.233)
(3) 제3의 길, "강한" 객관성 제시
-현재의 이분법적 구도:
“객관성―때때로 “객관주의”로 언급되는―에 대한 전통적인 생각의 관점에서 보면, 객관성을 포기하게 되면, 유일한 대안은 문화상대주의(한 사회나 하위문화에서 합리적인 주장으로 간주되는 것이 다른 사회나 하위문화에서는 그렇게 간주되지 않는다는 사회학적 주장)에 머무는 정도가 아니라, 그보다 더 악화된 형태인 도덕적 판단의 상대주의 혹은 인식론적 상대주의에 이르는 것이 된다. (...) 객관주의를 비판하는 사람들의 위치를 이렇게 불합리할 정도로 환원시키는 것이 강력한 유인책이 되어 객관성은 가치중립성을 필요로 한다는 판에 박힌 생각은 더 이상 의문의 여지가 없을 정도로 확고해진다. 객관주의의 관점에서 보면, 객관주의에 반대하는 입장에는 오직 도덕적 판단의 상대주의(judgemental relativism)만이 있을 뿐이다.
인식론적 입장을 가치중립적인 객관성을 확고히 지지하는 입장과 도덕적 판단의 상대주의를 지지하는 입장으로 양분해야 한다는 주장은―이 구분은 불행하게도 객관주의의 수호자들뿐 아니라 객관주의를 비판하는 많은 사람들의 동의도 얻은 것인데―가치중립적 객관성을 자연과학자들과 사회과학자들에게 실제보다 훨씬 더 매력적으로 보이게 하는 데 성공했다.” (p.212)
“이 책의 논거들은 가치중립적인 객관성과 도덕적 판단의 상대주의 사이에서 하나를 선택해야 하는 비생산적이고 암울한 상황에서 비켜나있다. (...) 입장론적 인식론은 역사적, 사회학적, 혹은 문화적 상대주의를 인정할 것을 요구한다. 그러나 그 상대주의는 도덕적 판단의 상대주의나 인식론적 상대주의는 아니다. 입장론적 인식론들은 인간의 모든 신념들이―우리들의 가장 뛰어난 과학적 신념들까지 포함하여―사회적으로 위치 지어진 것임을 인정할 것을 요구한다. 그러나 그 인식론들은 또한 어떤 사회 상황들이 가장 객관적인 지식 주장들을 생산하는 경향이 있는지, 그것을 결정할 수 있는 비판적인 평가가 이루어져야 한다고 본다. 그 인식론들은, 도덕적 판단의 상대주의와는 달리, 역사적으로 위치한 신념과 최대한 객관적인 신념 간의 관계들을 과학적으로 설명할 것을 요구한다. 따라서 그 인식론들은 객관주의의 약한 관성과 그 거울 속 짝이라고 할 수 있는 도덕적 판단의 상대주의와는 대조를 이루는, 내가 강한 객관성(strong objectivity)이라고 이름 붙이려는 그것을 요구한다.” (p.216-217)
-강한 객관성이란 무엇인가:
“만약 과학적 가설들을 지지 혹은 거부하는 데 집결된 모든 증거들을 비판적으로 조사할 수 있게 되는 것이 목표라면, 문화적 의제들과 전제들도 과학적 연구과정 내부에서 비판적 조사의 대상이 되어야 할 것이다. 바꿔 말하면, 강한 객관성이란 그처럼 강력한 배경적 신념들에 대한 체계적 조사를 포함시킬 정도로 과학적 연구의 개념을 넓히는 것이라고 말할 수 있다.” (p.227)
“입장론이 요구하는 강한 객관성은 “좋은” 신념과 “나쁜” 신념의 형성과 정당화 둘 다에 대해 균형 잡힌 설명들을 우리에게 제공한다는 점에서 지식사회학의 “강한 프로그램”과 비슷하다. (...) 그러나 “강한 프로그램”과는 대조적으로, 입장론은 단지 실험실 내의 미시적 과정뿐만 아니라 사회 체제 내의 거시적 경향들도 과학적 실천들을 구체화시키는 것이기 때문에 인과론적 분석의 대상이 돼야 한다고 주장한다. 더욱이, 거시적 경향들에 대한 관심을 통해 우리는 현재 지식사회학이나 과학철학이 줄 수 있는 것보다 좀더 확고한 성찰성을 가질 수 있게 된다.” (p.227-8)
4. 포스트모더니즘의 비판에 대한 답변
-비판:
““강한 프로그램” 이론가들은 진정으로 과학적인 지식사회학이라면 어떻게 어떤 신념들은 정당성을 획득하고 어떤 신념들은 그렇게 하지 못하는지에 대해 신비주의적인 철학적 설명들을 하는 대신 과학사들과 사회학들로 접근해야 할 것이라고 주장한다. 즉, 잘못된 신념들의 발생과 수용을 설명하는 데 인용되곤 하는 그 원인들과 같은 종류의 원인들로 “진정한 신념들”의 발생과 수용을 설명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 이들은 이러한 관점에 근거해, 지식의 토대를 추구하려는 시도들이 과학학(social studies of science)에서 드디어 불신의 대상이 되어가는 바로 이 시점에, 페미니스트 입장론자들은 지식의 토대를 복권시키려고 한다고 비판하는 것이다.” (p.252)
-답변:
“그러나 페미니스트 입장론자들이 여성들의 삶에서 시작하는 연구에 대해 일종의 초역사적인 특권을 주장하는 것은 아니다. 또한, 페미니스트 입장론자들은 여성들의 신체, 여성들의 직감, 여성들이 말하는 것, 혹은 여성들의 경험들이 지식의 토대를 제공한다고 주장하지 않는다는 점을 환기할 필요가 있다. 여성들이 말하는 것과 여성들이 경험하는 것이 연구 계획과 결과에 중요한 실마리를 제공하는 것은 사실이지만, 입장론자들에 따르면, 페미니스트 지식에 정당성을 부여하는 것은 여성들의 삶으로부터 나온 객관적인 관점이다.” (p.252-253)
“우리는 지식의 초역사적 토대를 밝혔다는 주장에 대해서는 회의적이어야 하지만, 지식임을 주장하기 위해서는 (자연적 원인들뿐 아니라) 그 역사적 원인들의 가능성까지 배제해야 할 정도로 엄격할 필요는 없다.” (p.254)
-페미니스트 포스트모더니즘의 주장에 대한 비판:
“역설적으로 들릴지 모르지만, 페미니스트 포스트모더니즘 자체가 너무나 많은 계몽주의 가설들에 동의하고 있다. 한 가지 예로, 개선된 과학과 인식론의 목표에 대해, 보다 명확히 말하면 페미니스트 과학과 인식론의 목표를 비판할 때에, 페미니스트 포스트모더니즘은 실현가능한 모든 과학과 인식론은―과학의 이름 안에 들어올 수 있는 모든 것은―근대, 남성중심, 서구, 부르주아의 형태 안에 포함될 수 있는 것이어야 한다는 계몽주의적 경향들에 동조하는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이것이 이상한 전제임을 알게 해주는 좋은 이유들이 있다. 아시아, 아메리카들, 아프라카의 고급문화들은―북대서양 문화가 등장하기 이전에 존재했던 문화들―그 시대의 기준에서 보면 정교한 과학들과 기술들을 갖고 있었다. 인류 이성의 범위는 근대 서구로 제한되지 않으며, 또한 근대 서구에 의해 전형적으로 제시되었다고 할 수도 없다. 만약 지식을 획득하는 다른 제도들과 실천들이 근대, 부르주아, 남성중심적인 서구가 아닌 곳에서 존재했다면, 왜 앞으로 어떤 다른 제도들과 실천들도 존재할 수 없을 거라고 가정해야 하는가?” (280-281)
================================================================================
주장의 결론에 대체로 동의하기 때문에 하딩의 주장을 논문으로 접했을 때에 매력적이라고 느꼈으나, 단행본은 예상보다 실망스러웠다. 450쪽 정도 되는 분량이라면, 보다 치열하고 정교한 철학적 논의 혹은 섬세한 역사학적 탐구가 포함되어 있으리라는 기대가 합리적일 것인데, 실상 철학적으로도 역사학적으로도 허술한 편이었다.
-단순히 과학철학이라는 분과학문의 틀 안에 논의를 가두지 않고 전체사회의 변화 속에서 논의를 전개해나가는 점에서, 하딩의 운동가다운 면모가 엿보였다. 그러나 이 탓인지, 논리적 상충이 있어서 단순 종합이 불가능한 두 입장을 '하나는 이럴때, 다른 하나는 저럴때 운동 전략으로써 효과적이다'라는 식으로 허투루 절충해버리는 모습을 보이기도 했다. (ex. 페미니스트 경험론과 페미니스트 입장론이 서로 다른 청중을 설득하기 위한 것이므로 둘 다 필요하다는 주장.)
-페미니즘 이론의 전반적 경향 변화가 "비판"에서 "재구성/생산"으로인데, 1991년이라는 비교적 최신의 저서임에도 불구하고 아직도 비판에만 초점이 맞추어져 있는 글이라는 점도 아쉽다. 특히나 하딩의 주장이 주목받는 이유는 가치중립적 객관성을 비판하면서도 객관성 자체는 버리지 않고 "강한" 객관성으로 종합해내었다는 점인데, 정작 이에 기반하여 소박한 경험주의 이상의 무언가를 만들어나갈 방법에 대해서는 지나치게 개념적이고 당위적인 차원에서만 논의되고 있다. (1) 철학적이거나 사회학적 논의의 지층들 속에서 자신의 주장을 정당화하거나 (2) 풍부한 역사적 사례를 통해 논증했더라면, "나쁜" 과학 비판, "정상" 과학(=가치중립적 객관성) 비판, 상대주의 비판이 번갈아가면서 무한반복되는 듯한 인상을 주지는 않았으리라 생각한다.
-"생성"의 가능성을 보여주는 보다 좋은 방법은 아마도, 저자 자신의 또렷한 세계관을 드러내는 방식으로 글을 쓰는 것이었을 것이다. 글의 논지가 가치중립적 객관성에 대한 비판인데도, 하딩의 글쓰기 방식은 자신을 드러내지 않고 있다. 물론 곳곳에서 '우리'라는 주어로 문장을 시작하곤 하지만, 이 '우리'는 특정한 사회적 집단을 지칭하는 용어라기보다는 저자와 독자를 함께 이르는 말로 쓰이고 있다. 페트리샤 힐 콜린스가 「흑인 페미니즘 사상」에서 '우리'를 '미국 흑인 여성(+하층계급)'으로 사용한 것과 대조된다.
'리뷰 > 도서' 카테고리의 다른 글
가장 특수하며 가장 보편적인 해방의 지식, 해방의 정치 ―『흑인 페미니즘 사상』 3부: 흑인 페미니즘, 지식, 권력 (0) | 2017.03.02 |
---|---|
[rough summary] 패트리샤 힐 콜린스, 「흑인 페미니즘 사상」 (0) | 2017.03.02 |
스티븐 체리 「용서라는 고통」정리 (6장~12장) (0) | 2016.12.13 |
스티븐 체리 「용서라는 고통」정리 (1장~5장) (0) | 2016.12.13 |
학교폭력의 발생·지속·재생산 기제: 「이지메의 구조」(일본) (0) | 2016.08.18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