용서라는 고통
부제: 상처의 황무지에서 싹틔우는 한 줄기 희망
지은이: 스티븐 체리 / 옮긴이: 송연수 / 펴낸 곳: 황소자리 출판사 / 2013년
스티븐 체리(Stephen Cherrry)
-더럼교구 발전지원 이사이자 더럼 대성당 참사회원
-케임브리지 대학교 킹스 칼리지에서 교수신부를 역임하며 신학과 윤리학 가르침
-신학자이자 심리학자
-용서의 의미와 실천에 관하여 박사 학위 취득
1장/ 손바닥 뒤집듯 할 수 없는 감정
“이후 수년간 그때의 경험을 돌이켜보면서 내 나름대로 하나의 결론에 이르게 되었다. 용서가 곧 고통이라는 것을! 용서는 결코 쉬운 해결책도 즉효의 처방도 아니다. 긴 시간이 걸리는 고통이다. 다만 그냥 고통이 아닌, 치유의 고통이다.(p.9)”
-용서의 어려움
““용서는 손바닥 뒤집듯 할 수 있는 일이 아니에요. 감정이 그렇게 간단히 바뀌지는 않으니까요.”(p.14)”
“1952년 C.S. Lewis는 베스트셀러인 자신의 저서 《순전한 기독교Mere Christianity》에서 이렇게 말했다. ”사람들은 용서가 아름다운 일이라고 말한다. 정작 자신이 용서할 일을 당하기 전까지는…….”(p.15)”
-그럼에도 필요한 용서
“한나 아렌트에 의하면, 용서야말로 “불가역성의 곤경”으로부터 헤쳐나오게 해줄 유일한 방법이기 때문이다. 용서는 과거의 굴레로부터 벗어나게 해준다. 리처드 홀로웨이의 표현을 빌리자면, 용서는 “과거의 쳇바퀴”에서 놓여나게 해준다. 데스몬드 투투도 “용서 없이는 미래가 없다.”는 말로 용서의 진정한 의미를 짚어낸다. 용서는 어렵지만 반드시 필요하다. (p.13)”
-사례 연구가 아닌 이야기들에 초점을 맞춤.
첫째로 용서는 이야기 형식으로, 반드시 시간과 함께 흘러가며 이루어지기 때문이며, 둘째로 용서 이야기는 다른 어떤 이야기들 못지않게 복잡하고 예측불가하기 때문이다. 용서를 종종 여정에 비유하거나 탐색이라는 모험의 속성이 들어있는 것으로 보는 것도 같은 이유에서이다.
-피터 셰퍼의 연극 <고곤의 선물> 中
“열정이라고요? 에드워드. 열정이 그게 다가 아니라는 걸 깨닫지 못하는 건가요? 우리 안의 삐뚤어진 열정을 죽이는 것도 열정이에요. 말장난하려는 게 아니에요. 가장 진실하고 용감하고 성숙한 열정은 발을 구르며 자신을 몰아가지 않아요. 분노에 휩싸여도 그 분노에 휩쓸리길 거부하는 게 열정이에요. 이 세상 그 무엇도 의지력으로 스스로를 변화시킬 수 있는 건 없어요. 오직 인간만이 그런 특권을 가지고 있죠. 피비린내 나는 참극을 끊임없이 부추기며 우리 옆구리를 파고드는 이 뾰족한 창을 우리 스스로 뽑아버리지 않으면 안 돼요. 그것도 아주 조심스럽게 빼내야 하죠. 그 속의 창자까지 같이 딸려나오게 해서는 안 되니까요.
.
용서를 한다는 것은 이처럼 도덕적이면서도 개인적인 어려운 도전과 마주하는 일이다. 내 옆구리에 깊숙이 박힌 창을 내 손으로 뽑아내는 일이다. 내 도덕적 감수성, 내 자존감, 내 원칙, 내 희망인 내 속의 창자들을 절대로 다치지 않게 하면서 정말로 조심스럽게 빼내야 하는 일이다. 헬렌은 이를 “우리 안의 열정을 죽이는 열정”이라고 표현했다. 헬렌이 주장하는 열정은 내가 상처받거나 남이 상처받는 걸 보았을 때 감정적인 반응을 보이지 말라는 뜻이 아니다. 분노, 복수, 비통, 원한을 넘어서서 앞으로 나아가는 더 나은 방법을 찾으려는 열정을 말하는 것이다. 우리가 받은 상처에 평생 사로잡혀 있거나 우리를 다치게 한 자들에 의해 한계가 지워진다거나, 그로 인한 피해의식에 짓눌리고 꺾이지 않으려는 열정을 말하는 것이다. (p.21-22)”
2장/ 상처의 황무지
“가장 슬프고도 무거운 삶의 한 단면은 누구든 부당한 피해나 상처를 입으면 이중, 삼중 아니 그 이상의 고통을 겪는다는 것이다. (p.23)”
“용서와 관련된 문제들은 객관적인 가해 사실(피해)가 아니라 가해행위가 초래한 주관적인 경험(상처)이라는 틀에서 생각해야 한다. 용서는 우리가 받은 상처, 즉 우리가 겪은 피해의 결과에 대한 반응이다. (p.33)”
-용서와 의지
“심각한 상처를 입거나 크나큰 상실을 경험하고 난 뒤 피해자는 진창에 빠져 헤어나지 못하는 자신의 현실과 차갑게 마주치게 된다. 대게 처음에는 일종의 무감각 상태가 한동안 지속되다가 이마저 사라지고 나면 급기야 날카로운 신경쇠약 증세로까지 이어진다. 무감각 상태(어쩌면 이 상태를 훨씬 넘어선 상태)에 빠져 있는 동안 피해자는 자신이 실제로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조차 명확히 인지하지 못한다. 피해자의 상황이 이렇다보니 의지나 욕구라는 문제의 표면에도 미치지 못하게 된다. 그야말로 상처의 황무지에 버려진 형국이다. (p.38)”
“용서하지 않을 자유가 있어야만 용서도 가능하다. 억지로 강요된 용서는 용서라고 부를 수 없다. (...) 그 말은 의지가 있어야만 용서할 수 있다는 뜻 아닌가? 우리 자신에게 용서하도록 설득해야만 가능한 일 아닌가?
이 질문에 답하기 위해서는 부서지고 갈라진 의지, 진창에 빠진 마음이라는 현실을 반드시 헤아려야 한다. 명료함, 강직함, 일관성, 목적지향성 같은 자질들은 당장 큰 상처를 받은 사람의 마음상태에선 기대하기 힘들다. (...) 정확히 자신이 무엇을 원하는지 전혀 확신하지 못하는 ‘의지의 혼란’을 겪기도 한다. (p.38-39)”
“이러한 도덕적 긴장은 피해자가 겪는 고뇌의 일부이기도 하지만, 그만큼 용서를 가치 있게 만드는 영적·윤리적 요건이기도 하다. 만약 정의나 도덕규범이 그저 복수의 문제라면 고뇌할 필요 없이 계획대로 실행하면 그만이다. 인과응보의 문제라면 적절한 처벌을 가하면 될 일이다. 존엄성이나 존중과 상관없는 인내의 문제라면 참고 견디기만 하면 된다. 반면 용서는 끊임없는 내적 갈등의 긴장상태와 결부된다.
그러므로 용서하려는 의지나 욕구의 문제를 이해하려면 그 상황이 간단명료치 않다는 현실도 반드시 명심해야 한다. 용서가 단순히 의지의 문제로만 치부된다면 용서하고 싶어도 용서할 수 없는 마음을 달리 설명할 길이 없다. (p.40)”
-트라우마
니체의 격언: 나를 죽이지 못하는 것은 나를 더욱 강하게 한다.
-> 적어도 두 가지 조건(① 개인적인 치유 ② 억압과 괴롭힘의 중단)이 충족되어야 적용될 수 있는 격언. 그조차 안 된다면 용서라는 건 상상 밖의 일.
3장/ 고문 그 후
“고문의 목적은 인간의 존엄성 파괴와 자유의 박탈이다. 따라서 고문이 성공적일수록 용서 자체가 불가능해진다. 왜냐하면 용서는 자유 의지가 있는 사람만이 할 수 있는 행위이기 때문이다. (p.52-53)”
-그럼에도 고문 후유증 속에서도 용서 이야기로 이해될 만한 사례
ex) 에릭 로맥스Eric Lomax의 이야기: 2차 대전 중 극동지역의 전쟁포로로 노역과 고문에 시달림. 전후 작은 마을로 돌아왔으나 소소한 일상마저 견디기 어려워하던 중, 고문 피해자 보호 의료재단의 지원을 받게 되면서 서서히 목소리를 되찾아감(2년 여). 나가세 타카시가 쓴 글을 접하고서 그가 자신이 물고문 당할 때 통역관이었음을 깨닫게 됨. 나가세가 포로들을 연민의 눈으로 바라봤음을 깨닫고 예기치 못한 충격을 받았음에도, 여전히 용서할 생각은 없었음. 그러던 중 로맥스의 아내가 나가세가 자신이 용서받은 느낌을 받은 일화에 대해 수기에 적은 부분에 매우 불쾌감을 느껴서 나가세에게 편지를 썼고, 나가세는 다시금 자신의 잘못을 곱씹고 반성한다는 진정성 있는 답신을 보냄. 이에 로맥스는 처음으로 용서가 추상적인 관념을 뛰어넘어 실질적인 가능성으로 변모하는 경험을 함.
-> 해방과 발견, 치유와 재통합의 순간.
“여기서 놓치지 말아야 할 포인트는 이 용서 이야기의 전체 줄거리가 주인공의 의지에 따라 흘러가지 않았다는 점이다. (...) 용서라는 단어의 뉘앙스가 아무리 복잡미묘하더라도 ‘용서’라고 불리는 덕목이나 자질이 따로 있다거나 그런 덕목이나 자질을 갖춘 사람이 따로 있다고 생각하는 것은 전혀 도움이 되질 않는다는 것이다. 결국 용서에는 여러 가지 사건들과 그에 따른 반응들, 그리고 몇 가지 덕목들만 있을 뿐이다. 그 덕목들이 수많은 우발적인 상황들에 따라 소용이 될 때도 있고 안 될 때도 있겠지만 말이다. (p.70-71)”
“추상적인 관념에 그쳤던 용서가 마침내 현실적인 가능성이 되기까지 ‘상상력의 해방’을 자극하는 여러 요인들이 복합적으로 작용했다는 점 때문이다. 반세기라는 오랜 시간, 의료재단의 관심과 지원, 특별한 계기가 되었던 뜻밖의 사건들, 나가세의 인간성 등 용서는 단순히 의지나 미덕의 문제가 아니었다. (p.72)”
-용서 이야기가 아닌 사례
ex) 사이먼 비젠탈Simon Wiesenthal의 사례: 유대인 강제포로수용소에서 겪었던 일화를 《해바라기》에 적음. 비젠탈은 어느 날 영문도 모른 채 죽음을 목전에 둔 한 나치 친위대 장교의 침상 곁에 불려갔는데, 나치 장교는 비젠탈에게 자신의 악행을 고백하고 용서받기를 원한다고 했음. 그러나 비젠탈은 아무 대답 없이 그대로 나와버림.
-> 용서를 구걸하며 “나는 자네가 누군지 몰라. 유대인이라는 것만 알지. 그거면 충분해.”라고 말했다는 사실에서, 나치 장교의 요구는 인간성과 개성의 부정이라는 근원적인 공격성, 즉 사람을 물건 다루듯 대하는 태도를 더 강하게 표출한 행위였음을 알 수 있다. 더 큰 비극은 나치 장교가 이를 자각하지 못했다는 데에 있다.
=> 용서 이야기가 아니라 영적 고통의 이야기
“용서는 서로 간의 존중이라는 바탕 위에서 자유의사를 가진 사람이 상대에게 자발적으로 주는 선물이다. 개인의 자유에 대한 인정과 존중 없이는 용서란 절대 있을 수 없다. 자유와 존엄성을 박탈당한 사람에게는 자기 의지대로 베풀거나 거둘 것마저 남아 있지 않은 까닭이다. 용서는 오직 자유로운 사람만이 할 수 있다. (p.77)”
“동정심 혹은 측은지심을 보인다는 것은 단순히 공정성을 구하는 것보다 더 역동적이며 그만큼 더 많은 조건들이 요구된다. 어떤 의미에서 보면 먼저 상대에게 공감하며 다가가려는 마음이다. (...) 용서란 상대의 마음과 정신세계로 걸어 들어가는 일이다. 그 과정에서 서로를 인지할 수 있는 가능성이 생겨나고, 용서의 밑바탕이 되는 일종의 ‘관계’가 맺어지게 된다. (p.78, 80)”
“용서를 고취시킬 수 있는 한 가지 방법은 용서가 불가능한 상황도 있다는 깨달음을 바탕으로 진지한 대화를 진전시키기 위해 노력하는 일이다. (p.82)”
4장/ 용서할 의무?
“가해행위가 계속되는 한, 최우선 순위는 그 행위를 중단시키는 것이다. 일단 중단되었다면 그 다음 관심을 쏟아야 할 우선순위는 비통과 정의다. (p.99)”
-성경의 ‘용서할 의무’에 대한 신학자로서의 해석
“‘용서할 의무’를 즉각적으로 완전히 용서해야 할 필요성으로 해석하는 것이 아니라 용서하는 마음을 함양할 정신적 의무, 공동체에 용서의 기풍을 확립할 의무로 해석할 때 ‘인간의 용서’에 대해 훨씬 더 현실적인 시각과 태도를 갖게 된다. (p.102)”
5장/ 분노, 분개, 원한
-분노
1) 엄청난 파괴력과 긍정적 추동력을 동시에 가질 수 있는 감정.
“분노의 위험성은 우리가 화를 낼 때 흔히 표출하는 여러 가지 반응들의 결과에 있다. (...) 이렇듯 우리는 분노를 느끼면 언어적으로든 물리적으로든 상대에게 미치게 될 해나 자신에게 끼치는 부정적 영향을 전혀 안중에 두지 않는다. 현명한 판단력도 손상을 입어 격분하지 않았더라면 굳이 감수하지 않아도 될 위험을 자초한다. 평소 같으면 하지 않을 말들로 상대의 마음에 깊은 생채기를 남긴다.
다른 한편 분노는 용기와도 맞닿아 있다. (...) 모든 분노를 죄악시해야 한다는 뜻은 아니다. 합당하고 적절한 분노는 그 자체로 정당하다. (p.116-117)”
2) 원인이 매우 다양.
“좌절당한 나르시시스트들은 분노를 느끼기 쉽다. 그렇지만 그 좌절이 부당함의 결과가 아니라서 소위 용서의 도움을 받기도 어렵다. 문제의 원인은 그들이 겪은 일이 아니라 그들 자신의 자기중심적인 기대와 헛된 희망이다. (...) 나르시시스트들에게 그리고 우리 내면의 자아도취적 성향에게 전달되어야 할 메시지는 ‘용서’가 아니라 오히려 ‘뉘우침’이다. 모든 화가 다 용서의 도움을 받을 수 있는 건 아니다. 누군가가 잘못을 저질렀을 때 하는 용서만이 의미를 가진다. 알다시피 용서는 그저 분노하는 사람이 분노를 가라앉히고 평온해지도록 돕는 방법이 아니다. 분노 그 자체도 중요하기 때문이다. (p.123)”
=> “용서는 우리로 하여금 분노를 조심해서 다루고, 그 원인을 찬찬히 살펴 현명하게 행동하도록 일깨운다. 용서는 우리가 전에 한 번도 해보지 않은, 어쩌면 우리의 직관에 어긋난 낯선 무언가를 하도록 이끈다. 또 용서는 일단 분노의 정당성이 확인되고 나면 더 이상의 분노를 내려놓고 과감히 넘어설 수 있도록 돕는다. 용서는 우리에게 화를 내지 말라고 다그치지 않는다. 반대로 불의를 보면 분노의 위험성을 감수해야 한다고 일깨운다. (p.124)”
-분개
: 분노(건강하고 뜨거운 ‘일상적인’ 화)는 시간이 지나면 가라앉지만, 간혹 마음속에 오래 머물거나 아예 자리를 틀기도 함. 이렇게 정착된 분노를 ‘분개’라고 부름.
“분개는 정의의 가치를 주장하는 정당한 감정이다. 우리 혹은 우리가 사랑하는 사람들에게 가해지는 악행에 항거할 길은 바로 이 건강한 분개를 통해서다. (...) 용서는 우리에게 정의에 대해 침묵하거나 무시하라고 채근하지 않는다. 오히려 정의에 귀 기울이고 이를 실천하며 살아가는 법을 배우라고 가르친다. (p.126-127)”
“분노의 위험성이 자기 망각을 불러올 만큼 가해자에게 집착하는 데 있다면, 분개의 위험성은 반대로 지나친 자기 몰입에 빠지는 데 있다. (p.127)”
“분개는 자아존중과도 관련이 있다. (...) 스스로를 존중하는 사람은 쉽게 용서하지 않으며, 오히려 가해자에게서 변화의 증거를 보고자 한다. (p.128)”
“머피는 가해 상태의 지속성 여부도 반드시 따져봐야 할 사항이라고 지적했다. 만일 누군가가 반복적으로 폭행당하거나 또는 지속적으로 억압받는 상황에 놓여 있다면, 그때는 분개의 단념이 완전히 잘못된 생각이라는 것이다. 왜냐하면 불편하고 불쾌한 감정이 우리에게 보내는 외침에 귀를 닫는 것이나 마찬가지이기 때문이다. (p.130)”
-원한
: 분개가 완강하고 끈질긴 속성을 띠게 되면 이를 ‘원한’이라 부름.
“지속적인 불의나 침해 혹은 억압의 상황에서 요구되는 감정이 바로 지금 말한 좋은 원한이다. (...) 그러나 분노나 분개와 마찬가지로 원한에도 위험성이 따른다. 원한이라는 감정에 익숙해지다 못해 심지어 의지하는 지경에 이르면 마치 눈으로 보지 않고도 운동이나 신체 균형을 느낄 수 있는 것처럼 원한이 소위 ‘마음의 평형감각’ 구실까지 하게 된다. 더 심한 경우에는 원한이 인성에 독으로 작용하고 아예 성격의 한 줄기로 자리잡아 상황이 변한 뒤에도 계속 남아 있게 된다. 성격으로 굳어진 원한은 남은 삶 전체를 소진시켜버릴 위험이 있다. 원한은 이를테면 생존 기제다. 위험이 가시면 구명조끼 벗듯 원한도 벗어버려야 한다. (p.132)”
“원한을 제대로 이해하기 위해서는 힘이라는 문제를 반추해볼 필요가 있다. 사람들이 서로 상처주는 이유들 중 하나는 힘의 불균형을 확인하고 이용하고 강화하려는 시도 때문이다. 실로 수많은 폭력들이 정확히 여기서 비롯되며, 이를 위해 물리적·언어적으로 상대를 굴복시키려는 온갖 방법들이 동원된다. 따라서 이 경우에 해당하는 질문은 “용서가 자연스러운 것인가 또는 간단한 것인가?”라기보다 차라리 “용서가 현명한 것인가?”여야 한다. (p.134)”
“맞서지 않으면 괴롭힘은 멈추지 않는다. 이것이 바로 가정, 학교, 직장, 기타 사회적 공동체에서의 법칙이다. 이러한 상황에서의 용서 욕구나 충동은 책임 있고 현명하게 대응하려는 자세, 우리 자신과 다른 사람들을 안전하게 보호하려는 태도와 정면으로 배치된다. 다시 말하지만 그래서 용서하는 마음이 쉽지 않은 것이다.
용서하고자 한다면 무엇을 용서하려는지 잘 따져보고, 그 용서가 세상을 좀 더 나은 곳으로 만들지 아니면 더 못한 곳으로 만들지 자문해봐야 한다. 용서는 윤리적 차원을 피하기 힘든 심리적·영적 과정이기 때문이다. (...) 지속적인 폭력이나 억압 상태에서 원한은 최선 아닌 차선의 대안일 수밖에 없다. (p.135)”
-좋은 원한과 나쁜 원한
: 억압적인 상황이 지속되는 동안의 원한은 마땅히 옳음. 단, 상황이 변할 경우 원한을 풀어버릴 마음을 가지고 있어야 함. 기억 속에 있는 사실 때문에 원한을 품게 되는 순간, 좋은 원한이 나쁜 원한으로 변함.
=> “용서하는 마음, 용서의 정신은 증오, 비통, 복수 대신 다른 선택의 가능성도 ‘열어둔다’는 의미다. 그 다른 선택이 과연 무엇이 될지 항상 명백한 건 아니지만, 중요한 것은 순간의 분노나 오래가는 원한 모두 넓은 의미에서 용서와 모순되는 감정이 아니라는 사실이다. 궁극적으로 삶은 너무나 복잡하고 문제들도 실타래처럼 얽혀있기 때문에 ‘용서를 하는 것’은 곧 정당한 분노와 분개, 좋은 원한을 품고서 무언가 창조적인 행위를 하는 것이라 말하는 편이 더 정확한 표현일 것이다. 따라서 용서하는 사람은 원한이라는 감정이 전혀 없는 사람이 아니라, 잠정적으로 품고 있지만 그 원한이 제 할 일을 다 하고 나면 가만히 떠나보낼 줄 아는 사람이다. (p.138-1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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