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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뷰/도서

스티븐 체리 「용서라는 고통」정리 (6장~12장)

용서라는 고통

부제: 상처의 황무지에서 싹틔우는 한 줄기 희망




6/ 살인 그 후

 

-살해당한 자의 유가족의 용서 이야기

1) 고든 윌슨의 이야기

: 1987118, 휴전기념 행사가 열리고 있던 북아일랜드 에니스킬렌에 폭탄테러가 발생했고 11명이 희생됨. 고든 윌슨은 스스로도 이 사건의 피해자였고, 함께 있던 딸 마리가 사망했기에 피해자의 유가족이기도 했음. 윌슨은 사건 직후 BBC와의 라디오 인터뷰에서 저는 제 딸을 잃었습니다. 하지만 제게 앙심은 없습니다. 아무런 원한도 품고 있지 않습니다.”라고 발언.

“1980년대 북아일랜드는 폭력과 보복, 공격과 응징의 한복판이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앙갚음이 다시 또 다른 앙갚음을 불러오는 도저히 멈출 것 같지 않은 끝없는 복수의 소용돌이에 휩싸여 있었다. (...) 그런 그들에게 윌슨이 인터뷰에서 다른 유명 슬로건을 인용해 내 이름으로 더 이상의 복수는 없다.”고 말한 것이다. (p.145)”

이 사건의 경우 (가해자의)뉘우침의 문제가 특히 더 중요한 이유는 뉘우침이 있어야만 용서가 가능하다는 생각이 북아일랜드 대다수 프로테스탄트들의 사고방식이었기 때문이다. (...) 용서를 소위 거래의 관점에서 보게 되면 사과와 뉘우침, 되도록 보상까지 요구되지만 북아일랜드의 경우 대다수 피해자들이 사과를 받을 가능성은 거의 희박하다.”는 것이다.

용서가 뉘우침에 따른 반응이라는 말은 사실상 피해자의 권한이 약화되고 화해의 수단마저 박탈됨을 의미한다. 가해자의 뉘우침 없이는 용서가 전혀 불가능한 것이라면 피해자들에게 과연 어떤 도덕적이고 현명한 선택권이 남겠는가?”하는 문제가 제기된다. (p.147-148)”

그는 용서라는 단어를 피한 대신 악의가 없다고 선언함으로써 새로운 가능성의 영역을 여는 계기를 마련했다. 이것이야말로 피로 얼룩진 폭력의 고리를 끊고 새로운 미래로 향하게 만드는 도덕적 창조성이다. (...) 내 생각에 그는 용서를 한 것이 아니라 용서의 정신, 용서하는 마음의 증거를 제시한 것이다. (p.149)”

윌슨의 말은 그 자체로 용서의 말이 아니었다. 정확히 말하면, 용서하는 마음에서 우러나온 말이었다. 그에게 용서하는 마음이 있었는가? 그렇다. 그가 용서했는가? 아니다. 다만 고든 윌슨의 사례에서 우리가 정작 떠올려야 할 질문은 따로 있다. 용서하는 사람이 되고자 하는가? 그렇다면 당신에게 요구되는 것은 무엇인가?” (...) 그래도 나는 용서하는 사람이 될 수 있는가?” (p.154-155)”

 

2) 메리언 파팅턴의 이야기

: 197312, 당시 스물 한 살의 여대생 루시 파팅턴이 실종됨. 20년이 지난 19943, 어느 부부의 집에서 그녀의 시신이 발견. 시신은 목과 사지가 절단된 상태로 하수관이 지나다니는 통로에 억지로 쑤셔 박힌 채 버려져 있었으며, 경찰에 의해 그녀가 납치 이후 강간·고문을 당한 끝에 끔찍하게 살해당했음이 밝혀짐.

살해당한 루시 파팅턴의 언니인 메리언 파팅턴은, 시신이 마침내 발견되었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 오랜 기간 자신을 괴롭혔던 트라우마에서 벗어날 무언가 긍정적인 것을 이끌어내기로 결심하고 장례식에서 동생의 두개골에 입 맞추는 경험을 함. 그러나 동생이 살해된 경위의 잔혹함으로 인해 뒤늦게 살기에 가까운 분노가 온몸을 관통. 그로부터 살인자인 로즈마리 웨스트에 대한 공감과 이해에 다다르고, 스스로를 동생의 슬픔, 고통, 죽음을 넘어선 여정으로 이끌 수 있는 보다 높고 넓은 차원의 인식에 이름.

용서가 살기에 가까운 분노의 경험에서 출발했다는 점은 상당히 역설적이다. 단순해 보이는 이 말 속에는 여러 겹의 의미가 깔려 있다. 우선 살기에 가까운 분노라는 이 말은 극악무도한 일을 겪은 사람이 부닥칠 수밖에 없는 도덕적이고 감정적인 한계상황을 반영한다. 동생의 두개골을 가슴으로 소중히 감싸 안았을 때 그녀는 이미 인간이 겪을 수 있는 모든 경험을 넘어선, 상상조차 하기 어려운 지점을 밟은 것이나 다름없었다. 그저 가슴 아픈 감정이 아니라 깊이를 헤아릴 수 없는 심연으로 한없이 빨려 들어가는 감정이었을 것이다. 한편 그 말은 그녀가 그 감정을 그저 경험한 데서 그치지 않고 자기 자신을 객관적으로 바라보고 있었음을 나타낸다. 자기 자신을 연쇄살인범과 관련지어 생각할 수 있는 자기인지가 가능했던 것이다. / 거기서부터 선한 나사악한 그들의 경계선이 허물어지기 시작했다. (p.158-159)”

루시의 이야기 속에는 지독한 공포와 슬픔이 서려 있다. 많은 사람들은 여기서 움츠러든다. 혐오감과 분노감을 느끼며 멀찌감치 떨어져서 고통으로부터 자신을 보호하려 한다. 반면 메리언이 자신의 분노에 보인 반응은 그것과는 정반대였다. 그녀는 자신의 차단막을 전부 허물어뜨리고, 완전한 타인이지만 어쩔 수 없이 연결되어 있는 한 인간을 이해하기 위해 노력했다. 밖으로 향하는 여정은 동시에 안으로 향하는 여정이기도 하다. 밖으로 무언가를 펼치려면 우선 안으로 당겨져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 (p.162)”

메리언은 꿈속에서 로즈마리 웨스트를 만나 용서한다고 말해보았지만, “아무런 의미가 없었다고 털어놓았다. 용서로 가는 길은 이보다 훨씬 더 절실한 곳에서부터 출발한다고 그녀는 믿고 있었다.

나는 나 자신을 용서하는 법, 남들도 나를 용서해줄 수 있다고 믿는 법을 배우게 되었다. 그 과정에서 내 썩어 들어가던 실수더미들과 마주치곤 했지만 그것이 또 내게 퇴비가 된다는 사실을 새로이 깨우치게 되었다. 아울러 거기서 의미를 찾아야 한다는 사실 그리고 인정하기 싫고 지워버리고 싶던 것들을 더 이상 밀어낼 필요가 없다는 사실도 말이다. 결국 그 모든 것들 또한 나의 일부이므로 오히려 그것들과 새로운 관계를 맺어나가는 편이 더 현명한 일임을 이해하게 되었다.’

이러한 사고야말로 메리언의 이야기 이면에 아로새겨진 가장 주목할 만한 장점이다. 부정적인 감정에 굴복하지 않고 더 나은 모습으로 진일보하겠다는 자기인지의 발로! (p.163-164)”

메리언 파팅턴의 이야기에서 우리가 주목해야 할 또 다른 측면은 창조성과 섬세함이다. 그녀가 보여준 태도는 소위 질 스코트가 말했던 용서의 시성詩性을 몸소 살려낸 것이라 말해도 과언이 아니다. (...) 하버드 법대 교수 마사 미노우Martha Minow는 충격적 경험에 대한 설명은 충분한 이해와 인식을 결여하게 마련이지만 그렇다고 해서 침묵만이 능사는 아니라고 말했다. 참담한 현실에는 치유와 회복의 언어가 필요하다. 시성이 가치 있을 수밖에 없는 이유가 여기 있다. 세심하게 고른 말 속에 들어 있는 섬세한 이해와 사려가 새로운 관계의 가능성을 내다볼 수 있게 해주기 때문이다. 시를 읽을 때면 하나하나 신중하게 골라낸 표현들이 귓가에 맴도는 법이다. 그만큼 말의 느낌이 중요하다. 용서도 마찬가지다. 현실의 고통 외에 관용과 신뢰를 느끼게 해주는 섬세한 공감이 전해지는 말이어야 한다.

질 스코트는 이렇게 말했다. “글의 형식과 전달에서 그리고 언어의 멜로디와 리듬에서 자연스럽게 솟아나는 시적인 용서야말로 우리가 읽고, 쓰고, 생각해야 할 최선의 지향점이다.” 이 말이 공상적으로 들릴지 모르지만 전혀 그렇지 않다. 용서한다는 것은 추하고 가혹한 사건을 똑같이 추하고 가혹하게 인식하거나 묘사하길 거부하고, 한 단계 높은 경지에서 바라보겠다는 의지를 밝히는 행위다. 단순히 복수를 하지 않겠다, 분노를 떨쳐버리겠다, 사과를 받아들이겠다가 아닌, 그 모든 것을 초월한 숭고함의 승리다. 창조성과 명시성, 시성을 함께 담아낸 언어는 그 숭고함을 대변하기 위한 영적 노력의 결실이다. 실천에 옮길 용서 이론은 피해자들에게 필요치 않다. 피해자들에게 정말 필요한 것은 용서 이야기다. 그리고 또 한 가지, 그 이야기의 줄거리 속에 스스로를 써넣겠다는 시적인 확신이다. (p.169-170)”

 

=> 두 경우 모두 용서라는 말은 없지만, ‘용서의 정신을 보여준 진정한 용서 이야기임. 용서 그 자체에서 해방되면서 진정한 용서가 이루어짐. 서로 전혀 다른 이야기였으나 둘 모두 관용, 포용, 창조성, 진정성이 담겨 있음. 둘 다 어떤 용서 규범이나 과정을 따른 것이 아니라, 고통과 죽음, 비통과 증오가 이야기의 최종결말이 되도록 만들지 않겠다는 의지를 갖고 기꺼이 한 발짝씩 내딛으며 모험을 감수한 사람들이었음.

 

 

7/ 영성으로서의 용서

 

-예수의 삶과 사역에서 인간의 용서를 찾아보는 장

 

 

8/ 용서자 신드롬

 

-4장이 용서의 의무를 다루었다면, 8장은 용서의 욕구에 대한 장.

 

1) 용서 부추기기

-제프리 머피 용서 부추기기forgiveness boosterism’, 이브 제럴드, 데이비드 맥노튼 값싼 부추김cheap boosterism’

용서를 도덕적이고 영적인 의무로 보는 일종의 용서 쏠림 문화는 현재 가해행위를 저지르고 있는 자에 대한 부정적인 감정과 적의까지 우리 마음에서 남김없이 없애야만 한다는 식의 잘못된 믿음을 심어줄 위험성이 있다. (...) ‘용서 쏠림 문화의 또 다른 위험성은 용서가 온당치 않는 상황에서도 피해자가 용서할 수 없음을 자책하게 만든다는 데 있다. 올바른 행동을 하면서도 죄책감을 품는 현실은 매우 안타깝다. 그러므로 용서를 강요하는 행위는 피해자의 삶을 더욱더 불행하게 만든다는 점을 반드시 유념해야 한다. (p.199-200)”

 

-토머스 브러돔Thomas Brudholm: 전반적인 정치 문화적 역학관계에 초점. 진실화해위원회 위원장 투투에 대한 정면 비판.

브러돔은 진실화해위원회가 역설적으로 두 가지 깨달음을 얻게 해주었다고 비아냥거렸다. 첫째는 용서가 피해자에게 다시 상처가 되기도 한다는 점, 둘째는 용서하지 않는 피해자도 존중받아야 한다는 점이 그것이다. 전자가 용서의 개념이 모호해진 측면과 관련이 있다면, 후자는 용서에 대한 극단적인 접근과 연관성이 있다. 브러돔이 언급한 극단적인 접근이란 용서를 피해자의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자발적인 선물로 보지 않고, 모든 피해자는 가해자를 무조건 용서해야 한다고 보는 접근을 뜻한다.

한편 용서의 개념이 모호해졌다는 말은 용서라는 단어의 뜻이 복수심을 극복하고 사면을 수락하는 의지로 변질됐다는 의미다. 이 경우 비록 분개심은 극복했어도 가해자는 반드시 처벌받아야 한다고 믿는 사람, 혹은 가해자를 격리해야만 분개심을 털어버릴 수 있다고 믿는 사람은 전혀 존중받지 못한다고 브러돔은 지적했다. (p.203)”

랩슬리의 이야기는 과도기적 시점에서 많은 문제들이 진실화해위원회(TRC)나 기타 법적 절차에 의해 제대로 처리되지 못한 남아공의 현실을 압축적으로 보여준 사례라 할 수 있다. 여기에는 특히 정의와 보상 문제가 깔려 있다. 용서하는 마음이 가해자가 치러야 할 대가까지 면제해주는 건 아니다. 용서가 허락하는 미래는 실질적인 요구가 있는 미래다. 가해자는 피해자의 상처와 아픔을 잊지 않고 함께 나누려는 자세를 가져야 한다. 용서만으로 악행의 결과가 저절로 없어지지는 않는다. (p.209 각주)”

=> ‘절제된 용서의 자세가 가해자의 변화는 무시한 채 용서자의 우월감과 미덕만 과시하는 소위 영웅적 용서를 바로잡는 교본으로 쓰여야 할 것.

 

-저자는 진실화해위원회가 한계를 가지고 있음에도, 브러돔의 비판은 지나치다고 생각.

그러나 진실화해 추진과정은 불안정한 정치사회 분위기를 신속히 정상화하겠다는 목적만 가진 과정은 절대 아니었다. 과도적 정의에 관한 실험의 장이기도 했다. (p.205)”

진실화해위원회는 지속적인 억압이나 폭력에 대한 대처방안이 아니라, 아파르트헤이트 종결에 따른 대응의 일환이었다. 피부로 와닿는 급박한 정치 경제적 문제들이 산적한 상황에서 어떻게 해서든 증오와 보복의 악순환에서 벗어날 방도를 찾아야 했다. 그 과정에서 용서가 지나치게 우선시되고 이를 뒷받침할 도덕적 자질들이 부풀려졌다면, 이는 어쩌면 심각하게 우려되던 유혈사태를 피하기 위해 치러야 할 작은 대가였는지도 모른다. 문제를 더욱 복잡하게 만든 것은 그리스도인들이나 다른 종교인들이 진실화해위원회를 너무 낭만적으로 이해하고 해석하면서 생겨난 진실화해위원회 신화. 이 신화가 용서 부추기기를 한몫 거들었다고 볼 수 있다. (p.210)”

 

2) 용서자 신드롬

: 자기 자신을 훌륭한 용서자로 인식하고 다른 사람들에게도 그런 사람으로 비치고자 하는 열망과 도덕적 우월감.

일반적으로 용서자 신드롬에 빠진 사람들은 첫째, 자신은 도덕적 흠결이 전혀 없으며, 둘째, 스스로 훌륭한 용서자라는 이중적 환상에 사로잡힌다. 하지만 진정한 용서자는 자신의 태도가 과연 올바른지 아닌지를 늘 회의하며 공감과 심사숙고 과정을 통해 자신의 한계와 약점을 충분히 인지하려 노력한다. 메리언 파팅턴의 표현처럼 자신의 썩어들어가던 실수더미들을 늘 상기하려 애쓴다. (p.218)”

 

=> ‘용서 부추기기는 거짓 용서를 부르고, ‘용서 신드롬은 용서에 집착한 나머지 용서의 본질을 놓치게 만듦.

 

한편 고통을 멈추려는 자연스러운 욕구에서 나타나기 쉬운 용서 충동도 심도 있는 고찰이 필요하다. 끔찍하고 참혹한 일을 겪은 사람들과 가족들은 상처가 남긴 깊은 트라우마와 자꾸 되살아나는 아픈 기억을 어서 끝내버리고 싶다는 종결욕구에 시달린다. 이 끈질긴 종결욕구는 좀처럼 잦아들기 어렵지만 실상 현실은 과거와 영원히 단절될 수 없다. 지속적인 고통과 심각한 장애를 짊어지고 살아가야 하는 사람들 또는 사랑하는 사람이 평생 불구로 살아가는 모습을 지켜봐야 하는 사람들은 그래서 더 가슴 아프고 힘들 수밖에 없다.

더구나 마음 속 깊은 흔적으로 남은 상처의 고통스러운 후유증은 겉으론 잘 드러나지 않는다. 용서는 상처를 참아내게 해줄 수는 있지만 그 자체를 결코 없애지는 못한다. 어떻게 보면 용서란 매일 매일 새롭게 시작해야 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따라서 용서는 고통이자 사랑이다. 현명한 용서자는 자기 안의 날카롭게 찢긴 구멍을 그냥 덮기보다 보듬고 살아가는 법을 찾으려 애쓴다. (p.223)”

한편 피해자 가족이나 친구로서 우리가 이러한 진실을 잊지 않고 기억한다면 그리고 인간의 용서와 그 현실적인 한계를 받아들인다면 고통과 실의, 절망에 빠진 피해자를 더 따뜻한 배려와 큰 격려의 마음으로 도와줄 수 있을 것이다. (p.224)”

 

 

9/ 악마와의 대면

 

-품라 고보도-마디키젤라가 아파르트헤이트 정권하에서 잔혹한 범죄를 저절러 212년형을 선고받고 복역 중인 유진 드 콕을 면담한 이야기. 악마로 불리는 유진 드 콕에게 공감과 연민을 느끼는 스스로의 모습에, 고보도-마디키젤라는 윤리적 긴장을 경험함.

용서에 수반되는 대가와 위험(...) 용서자에게 요구되는 공감이 오히려 용서자를 범죄자의 혼돈과 파괴 심지어 잔인함의 세계로 끌어들이기 때문이다. 용서자에게는 가장 달갑지 않고, 꺼려지는 부분이다. 어떻게 보면 상처의 황무지로 들어가는 모험일 수도 있다. (p.231)”

공감은 우분투에서 핵심적인 요소다. 그러나 우분투가 주로 피해자에 대한 공감이라면, 용서는 피해자가 가해자에게 공감하는 것을 말한다. 때문에 차라리 가차 없는 보복이 낫다고 여기거나 그냥 참아내는 편을 택하기도 한다. (p.237)”

-> 달갑지 않은 공감

 

-그럼에도 불구하고 공감은 용서로 가기 위한 길

공감은 진정성의 문제다. 공감은 가해행위의 뿌리인 가해자의 정신과 마음을 들여다봐야 하는 현실이다. 추상적인 의미에서의 공감이 용서에 다다를 수는 없다. 서가 비로소 가능한 영역으로 옮겨가는 계기는 정도와 깊이를 더해가며 진지한 공감이 구체적으로 진전될 때 찾아온다. 용서는 객관성과 거리의 문제가 아니라 주관성과 관계의 문제다. 따라서 용서는 진정한 친밀성을 필요로 한다. (p.232)”

냉혹함과 비정함을 상상한다고 해서 스스로 그런 사람이 된다는 뜻은 아니다. 오히려 그 반대다. 왜냐하면 그런 자들에게 공감하는 과정 속에는 피해자에 대한 공감도 함께 들어 있을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p.247)”

가해자에게만 무조건적으로 공감하는 피해자는 자신의 상처에 대한 현실감은 물론, 분노나 분개라는 정당한 감정에 대한 현실감까지 잃을 위험이 있다. 실제로 잃기도 한다. 독재자, 상습폭력범, 협박범들의 가혹행위는 이 무조건적인 공감에서 나온 인내를 동력으로 삼아 그칠 줄 모르고 무섭게 내달리는 습성에 기인한다. (...) 용서는 상처의 황무지에서 시작되지만, 자신이 디딘 곳이 상처의 황무지라는 현실조차 깨닫지 못한다면 용서는 시작조차 불가능하다. (p.248)”

-> 공감은 비록 내 마음은 당신이 준 고통으로 가득 차 있지만 내게 준 고통으로 인해 당신이 느낄지 모를 고통이 들어올 자리도 내 마음속 공간에 남겨두려 노력합니다.”여야 함.

 

-용서의 힘

: 용서는 가해자가 저지른 행위를 그냥 넘기는것이 아니라 넘어서는. ‘한 인간으로서 나는 네가 내게 저지른 악행을 똑같이 반복할 수 없으며 반복하지도 않을 것이다.’라는 뜻을 전달하는 것이기에, 피해자의 승리. 고귀한 복수.

용서의 결과는 다름 아닌 부활이다. 피해자는 이제 더 이상 피해자나 부당한 상처에서 살아남은 생존자가 아니라 승리자로 거듭난다. 한쪽이 이기고 다른 한쪽이 지는 의미로서의 승리가 아니다. 진정한 용서는 되돌릴 수 없는 것을 되돌리는 반전의 제로섬 게임이 아니다. 진정한 초월과 부활의 문제. 가해자를 꺾고 피해자가 이기는 승부가 아닌, 오히려 피해자가 가해자에게 치유와 자유의 기회를 주는 선물이다. 진정한 용서가 진정 꺾어야 할 대상은 죽고 죽이는 악의 흉포한 힘이다. 악에 대한 자비의 승리, 비정에 대한 공감의 승리다. 소외에 대한 치유의 승리, 냉혹함에 대한 관대함의 승리. (p.253)”

 

-용서와 정치의 딜레마

용서는 곧 폭력의 악순환을 끝낼 수 있는 힘이다. 용서자의 승리는 적을 무찌르는 것이 아니라 교전법칙을 바꾸는 데 있다. (p.239)”

용서가 폭력과 보복의 악순환을 전환하는 힘을 가진다면 실질적인 정치적 영향력을 띤다는 의미와도 같다. 그래서 사람들이 공적이고 정치적인 과정에서 용서를 이용하려 들면 그 힘이 변질돼버리고 결국은 그 전환적 힘이 사라지거나 타락하거나 무가치한 목적을 위한 수단으로 굴러떨어진다. (p.240)”

 

남아프리카공화국에서 우분투는 지역적인 독특한 감성을 표현하는 말이라기보다 연대감 형성의 가치를 일깨우는 데 주로 쓰이는 말이다. 이러한 우분투는 아파르트헤이트의 종식뿐만 아니라 이후의 화해적 분위기를 조성하는 데도 매우 주요한 개념이었다. 인간은 근본적으로 서로 다른 별개의 존재가 아니라는 것. 즉 흩어진 개인들의 관계맺기가 아니라 맺어진 관계 자체가 이미 인간의 근본 조건이라는 뜻이다. / “우리가 있기 때문에 내가 있다.”라는 문구가 이 개념을 제대로 살려낸다고 볼 수 있겠다. (...) 우분투 정신은 용서라는 개념에 개인주의적인 문화 그 이상의 새로운 맥락을 제공한다. 개인주의적인 시각에서만 보면 용서할 수 있는 사람은 오로지 피해자뿐이다. 반면 고보도-마디키젤라가 이야기하는 공감은 우분투적 접근방식의 반영이다. 한 인간의 개별적인 자질이나 경험보다 함께함공동체가 더 중요하다는 것이다. (p.234)”

모든 용서 행위는 보다 넓은 역사적·사회적·정치적 맥락 안에서 일어난다. 동시에 각각의 용서 행위는 정도는 다르되 다시 그 맥락에 영향을 미친다. 용서를 분노에 찬 개인이 특정 상황에서 취하는 행동이나 과정(이를테면 객관적이고 합당한 정의실현 행위)으로만 보면, 가해행이와 이를 둘러싼 전체적인 맥락 그리고 용서든 복수든 그에 따라 나타날 후속 과정들을 제대로 파악하는 데 어려움을 겪는다. 실제 용서는 복잡한 맥락, 즉 일종의 영적·윤리적·관계적 생태계 안에서 이뤄지게 마련이다. 이 말은 용서가 무조건 상황에 좌우된다는 뜻이라기보다 용서가 상황을 전환시킬 힘을 지닌다는 의미다. (p.243)”

 

정말로 중요한 건 명확한 인과관계를 확인하기 어려운 공적인 정치의 장과 소위 우리가 말하는 용서를 연결시키려는 다층적이고 다각적인 소통이다. 대화의 끈을 이어가고 거기서 새로운 사실을 알아가고 실패와 성공을 겪어나가는 일이 진정 책임감 있는 태도다. 용서와 복수를 양자택일의 문제로만 보고 양 극단 사이에 치유 공간이 열려 있다는 희망을 버리는 것은 전혀 도움되지 않는다. 오히려 용서는 감정적 고려와 윤리적 고려 양쪽을 통합하고, 나아가 초월하는 일이다. 또한 피해자가 더 이상 피해자로 머물지 않게 되는 날이 올 때까지 혹시라도 발생할지 모를 여러 개인적·상황적 문제들을 슬기롭게 극복해 나가는 일이다. (p.243-244)”

한편 고보도-마디키젤라는 우리가 진지하게 자문해야 할 것은 사회적 환경이 용서를 북돋우는 분위기냐 아니면 가로막는 분위기냐라고 강조한다. “문제는 피해자가 가해자를 용서할 수 있는가 아닌가가 아니라 우리(우리의 상징, 언어, 정치, , 언론, 학계)가 복수의 대안을 생각할 만한 환경을 조성하고 있는가 아닌가라는 뜻이다. 이는 수십년에 걸친 독재나 압제에서 풀려난 국가에만 해당하는 질문이 아니라 언제 어느 때라도 가정과 국가 모두에 적용되는 질문이다. 또 가해자는 우리와 다른인간이기 때문에 반드시 처벌하고 격리해야(또는 처벌과 격리 모두) 하는가의 문제가 아니라 가해자도 우리와 같은인간이기 때문에 공동체의 일원으로 받아들여야 하는가의 문제다(여기서 말하는 우리란 직간접적인 피해자뿐만 아니라 더 넓은 의미에서 가까운 제3자와 낯모르는 방관자까지 모두 포함한다). (p.244-245)”

정의 과정과 용서 과정은 별개. 정의 과정이 국가 또는 공동체와 범법자 간 문제라면, 용서 과정은 인간과 인간 간 문제다. 용서 과정을 피해자와 가해자 간 문제로만 보면 용서하는 마음, 용서의 정신을 담아내는 데 한계가 있다. 그보다 더 넓은 차원에서 보면, 용서는 상처의 황무지라는 거칠고 메마르고 차디찬 돌무더기 땅을 헤치고 앞으로 나아가는 것을 의미한다. 그렇다고 문제를 부정하거나 가해자를 묵인하는 것도 아니요, 우리를 황무지로 데려갔던 그 일을 잊어버리는 것도 아니다. (p.254)”

 


10/ 다시 상상하는 용서

 

-질 스코트 용서의 시학

: 스코트가 사용한 시적이라는 말은 서정적혹은 낭만적이란 뜻이 아니라 창조성에 대한 언급. -> 용서는 창조적 행위

-자크 데리다

: 용서할 수 없는 것을 용서하는 것만이 진정한 용서이며 그와 같은 순수한용서는 미친 짓이라고 함. -> 용서는 카테고리 개념

-품라 고보도-마디키젤라

: 용서란 무엇인가의 문제에서 벗어나 용서가 자랄 수 있는 환경을 사회가 어떻게 조성할 것인가?”의 문제로 옮겨가야 한다고 주장. -> 그 환경을 조성하려면 피해자들에게 용서를 강요해선 안 되며 오히려 그들이 더 자유로움을 느낄 수 있도록 힘을 북돋워줘야 함

 

가해자의 뉘우침이 없다고 해서 공감의 필요성까지 사라지는 건 아니다. 피해자는 자신이 걸어 들어간 달갑지 않은 공감의 강물 속에서 그냥 고통이 아니라 치유의 고통을 느끼기 때문이다. 그 강물에 몸을 맡긴 동안 피해자는 자신이 받은 상처와 뜻하지 않은 현실에 대한 엄청난 분노 그리고 가해자도 똑같은 인간이라는 깨달음 사이에서 찢어지는 아픔을 경험한다.

강물을 헤쳐나가는 여정이 지속될수록 고통은 점점 더 커져만 간다. 때문에 피해자는 어쩌면 상처의 황무지를 벗어나고 싶지 않을지도 모른다. 차라리 그곳에 위로와 안식이 있는 것처럼 여길지 모른다. 가해자만 마음속 감옥에 가둬두면 자신에게 남은 유일한 피해의식 안에서 안주하며 살 수 있다고 믿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상처의 황무지는 계속 머무르기엔 너무나 외로운 곳이다. 새로운 땅이 보이는 저편으로 다가갈수록 마음의 감옥 문이 조금씩 열리고, 그 속에 갇혔던 가해자도 비로소 풀려난다. 마침내 강물 밖으로 나와 새로운 땅에 발을 내디딘 피해자는 가해자에게 자유라는 선물 말고도 또 하나의 선물을 건네게 된다. 바로 피해자로서의 자신을 내어주는 선물이다. 그럼으로써 가해자는 용서와 자신이 피해자로 만든 사람이 키워온 피해의식이라는 두 개의 무거운 짐을 짊어지고 새로운 땅으로 걸어 들어간다. 가해자에게는 낯설면서도 새 생명을 주는 짐이다. 그것은 용서받았다는 기억이기 때문이다. (p.268-269)”

 

용서는 결코 종결을 암시하지 않는다. 그러므로 용서가 끝났다 혹은 용서를 끝냈다라는 말은 있을 수 없다. 우리의 의도와 능력, 대응 모두가 개입됐더라도 용서는 개인적인 성취가 아니다. 용서는 단계적인 과정도 아니다. 몇몇 용서 사례들이 정확히 단계를 밟아간 과정으로 이해되기도 하지만 용서에 표준적이거나 규범적과정이란 없다. 현실에 그런 삶이 없는 것과 마찬가지다. 용서는 과거의 상처를 없던 일로 만드는 것이 아니다. 이는 용서가 불가역성의 문제를 다루는 일이라는 한나 아렌트의 유명한 발언이 과장된 탓이다. 오히려 용서는 불가역성의 문제를 끌어안고 살아가는 일이다. (p.269-270)”

 

용서는 화해와 다르다. 만일 내게 상처준 사람을 용서하면 그 사람과 다시 예전처럼 지내야만 한다는 생각에 용서를 두려워할지 모른다. 하지만 이는 전혀 사실이 아니다. 그건 마치 시간을 거꾸로 되돌린다는 말과 똑같다. 용서는 새로운 나, 새로운 관계로 나아가는 새로운 방법이다. 용서는 상처와 피해를 묵과하지 않는다. 폭력과 죽음을 외면하지 않는다. 잔인한 진실을 더 넓은 목적과 현실이라는 맥락 안에서 숙고한다. 상처를 잊는 것이 아니라 상처의 기억이 남은 삶을 지배하지 않도록 하는 것이다.

그 일은 시간을 멈추게 했지만 용서는 시간을 다시 흐르게 한다. 그렇다고 해서 용서가 망각이란 뜻은 아니다. 용서는 사건이 일어난 날짜와 시간을 지금 현재가 아닌, 기억 속 과거라는 원래의 제자리로 돌려놓는다. 용서하는 사람은 미래를 살아갈 자유, 상처의 황무지에서 강물을 건너 새로운 땅으로 걸어 들어갈 자유를 되찾는다. (p.270-271)”

 

 

11/ 용서하는 마음

 

-용서하는 마음의 네 가지 자질

높은 수준의 공감

미래지향성

믿음

정의감

첫째, 정의감을 결여하면 불의를 외면하거나 묵인하게 되므로 용서의 필요성조차 사라진다. 둘째, 미래지향성을 결여하면 과거에 갇히게 되므로 용서보다는 처벌이나 복수에 집착한다. 셋째, 믿음을 결여하면 불의가 극복되리라는 희망이 없으므로 용서할 이유도 희박해진다. 넷째, 공감을 경려하면 아무런 설명이나 해명을 얻지 못하므로 용서 여부를 판단할 근거를 잃는다.

정의, 미래지향성, 믿음 모두 중요하지만 가장 기본적인 자질은 공감이다. (p.289)”

 

사람들은 흔히 회복적 정의와 용서를 연관시킨다. 회복적 정의는 미래가 응과응보와 처벌이라는 과거에만 좌우되도록 내버려두기보다 미래를 위해 현재 상황을 더 낫게 만들겠다는 변화 의지를 담고 있다. 그러나 회복적 정의가 곧 용서는 아니다. 다만 미래지향성이라는 공통점 아래 회복적 정의의 실천 과정에서 이따금 용서가 따라 나오기도 한다. (p.284)”

 

 

12/ 현자의 선물

 

-용서의 여정을 걷고자 하는 피해자에게 우리가 어떤 도움을 줄 수 있는가. 길동무의 자질.

황금: 공감과 인내심을 갖춘 경청

몰약: 악의 유혹을 끝까지 견뎌낼 정신적 강인함과 고통과 죽음 앞에서도 굴하지 않을 자신감으로 미래를 두려움 없이 긍정적으로 가슴에 품도록 만듦

유향: 신의 용서와 인간의 용서의 차이를 알게 하고 반성과 후회, 보상이 적용될 만한 상황이 각기 다름을 인식하도록 도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