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성해방 길찾기③]
정체성 정치를 넘어서, 여성해방이라는 “정의(justice)”를 향해
* 이전 글을 읽으려면: [여성해방 길찾기①] “여성혐오”, 여성에 대한 문화적 부정의(injustice)의 다른 이름
[여성해방 길찾기②] 여성혐오에 맞선 인정 투쟁: 메갈리아, 강남역 10번 출구, 그리고 그 이후
앞선 글들에서는 메갈리아, 강남역 10번 출구, 그리고 그 이후 온라인 공간을 중심으로 진행된 여러 활동들의 필요성과 의의를 강조하는 방식으로 살펴보았다. 그러나 한계점이 있는 것도 분명한 사실이다. 물론 거센 반발을 경험하고 있다는 것 자체가 현재의 운동방식의 한계로 지적될 수는 없다. 경제적 부정의에 대항하는 것이든 문화적 부정의에 대항하는 것이든, 기득권과의 투쟁에 어떻게 저항이 없으리라 기대할 수 있겠는가. 단순히 표현 방식이 ‘폭력적’이기 때문에 문제라는 주장이 타당하지 않다는 것도 분명하다. 진중권의 말처럼, “이들은 이 두 극단[일베와 메갈리아]만 사라지면 자기들처럼 양식 있는(?) 사람들로 이루어진 건전한 사회가 실현된다고 굳게 믿는 모양”이지만, 이는 여성에 대한 문화적 부정의의 존재도 인정하지 않는 입장이기 때문이다. 게다가 ‘강남역 10번 출구’ 이후에는 메갈리아와 달리 미러링을 사용하지 않는 페미니즘 그룹들까지 저마다의 목소리를 내고 있는데도, ‘폭력성’을 문제삼는 이들은 ‘메갈리아 사냥’을 하며 마음에 들지 않는 주장을 짓누르기 위한 손쉬운 표지로 활용하고 있지 않은가.
하지만 모든 반박과 저항을 기득권을 옹호하려는 자들의 궤변으로 치부하고, 끊임없는 쇄신의 의무를 내려놓아서는 안 된다. 언제나 쉬운 길은 정답이 아니다. 빗발치는 반박의 목소리 속에서 건전한 비판을 찾아내고 이를 진지하게 고민함으로써 더 나은 해결책을 모색해나가는 것이, 보다 정의로운 사회를 꿈꾸는 자들의 임무일 것이다. ‘폭력적’이어서 문제인 게 아니라 해서, ‘폭력적’인 방식으로 계속하면 여성해방이 찾아오는지를 질문해야 한다. 거센 반발이 있어서 문제인 것은 아니어도, 운동의 목표가 될 정의로운 사회의 상에는 현재 반발하고 있는 자들도 포함되어야 함을 주지해야 한다. 그렇다면 뜨거운 에너지의 존재 자체에 경탄하는 것을 넘어서 에너지가 표출될 방향을 고민하고 있는 이 때에 던져야 할 질문들은 다음과 같을 것이다; 인정을 위한 투쟁의 목표는 무엇으로 삼아야 하는가? 인정투쟁의 과정에서 빠질 수 있는 위험성은 무엇이며 어떻게 극복할 수 있는가? 여성해방이라는 궁극적인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서 현재와 같은 방식의 운동만으로 충분한가?
가장 많은 비판을 받아온 한계점은, 메갈리아를 기점으로 시작된 인정투쟁이 정체성 정치에 머무르는 모습을 보였다는 것이다. 정체성 정치란, 소외받는 집단의 독특한 문화적 정체성이라고 알려진 것을 정당화함으로써 이들 집단의 모욕적 재현에 대항하는 것을 목적으로 하는 인정투쟁 방식을 말한다. 젠더 이슈에 적용해보면, 여성적이라 추정되는 문화 특수성 혹은 차이에 주의를 집중하여 이에 대한 공격을 방어하는 방식이 될 것이다. 메갈리아의 ‘미러링’은 물론이고, 메갈리아의 분화 이후 ‘일상 속 게릴라전’이라고 불릴 만한 온라인 국지전은 대부분 ‘여성적인 것’으로 코드화된 것들에 부여된 모욕적인 사회적 시선을 공격하는 양상을 보였다. 그 과정에서 피해를 공유하는 집단인 여성들끼리 강한 연대감이 형성되었고, 이것이 폭발적인 화력을 지닌 활동의 원동력으로 작동했다.
이러한 방식도 어떤 맥락에서는 남성 중심적 규범을 해체시키는 방향으로 진보를 만들어낸다. 그러나 정체성 정치는 ‘정의’와 ‘옳음’의 문제를 전면에 내세우기보다 특정 정체성에 대한 피억압집단의 동일시를 원동력으로 삼아 움직인다. 그 결과, 물화(retification)의 문제를 낳는다. 해당 정체성을 본질화하고 집단 문화를 공고화하는 방식의 본질주의로 빠지기 쉽기 때문이다. 낸시 프레이저는 물화의 해악에 대해 “개별 성원이 집단 문화에 순응하도록 압력을 가하며, 그들 삶의 복잡성, 그들 정체화의 다층성, 그리고 그들 사이의 다양한 제휴의 교차성을 거부한다. 차이들을 가로지르는 상호작용을 증진하기는커녕 분리주의와 억압적 공동체주의를 촉진하는 방식으로 집단 정체성을 물화하고 공유된 인간성이라는 쟁점을 도외시”한다고 적었다.
분리주의는 메갈리아에서부터 강남역 살인사건을 둘러싼 투쟁, 그 이후의 활동들에 이르기까지 곳곳에서 발견된다. 물론 여성에 대한 문화적 부정의가 ‘여성성’의 기호를 향해 쏟아지기 때문에, 이에 대해 문제제기하고 저항하려면 성 인지적인 관점이 필요하다. ‘남성, 여성 할 것 없이 모두 사이좋게 지내요’라는 나이브한 태도는 해결책이 아니라 문제 자체의 은폐로 이어질 것이다. 그러나 현재 벌어지고 있는 온라인 전쟁의 전선은 지나치게 성별을 기준으로 그어져 있다. 몇몇 매체에서는, 남성이 비난 받지 않고 젠더 이슈에 대해 발화할 수 있는 방식은 오직 “나는 한남충이었으며, 지금도 완전히 탈피하지 못했지만, 피해당사자인 여성들의 말을 경청해서 잘 배우겠다.”는 것뿐인 듯 보인다. ‘여성’ 집단에의 구성원이라는 사실에 기반해 형성된 연대감은 이처럼, 인정 투쟁을 성 대결 구도로 끌고 가는 또 다른 요인이 된다. 하지만, 당연한 말이지만, 성별과 무관하게 누구나 여성주의적 주체가 될 수 있으며 페미니즘의 목표는 젠더가 억압기제로서 작동하지 않는 정의로운 사회로 나아가는 것이다. 성 대결에서의 승리를 목표로 삼는 것은 전략적으로도 당위적으로도 바람직하지 않다.
물화의 또 다른 해악은, 여성의 발화도 제약한다는 것이다. 현재 온라인 공간에서는 반발하는 측에서 평등을 외치는 여성을 성별이 여성이라는 이유로 낙인찍는 것만큼이나, ‘이미 상정된 여성주의자의 정체성’에 어긋나는 발언을 하면 페미니스트들로부터 ‘명예남성‧명예자지’라는 비난이 날아드는 모습을 관찰할 수 있다. 이처럼 억압적 공동체주의는 특정한 방식으로만 말하도록 구성원들을 구속함으로써, 정체성 내의 가부장성 및 전체성을 비판할 수 없도록 만든다. 메갈리아 미러링의 가장 큰 문제점은 그것이 사회에 만연한 다른 혐오들—게이(‘똥꼬충’), 장애인, 저소득층 등—을 뒤집지 않고 재생산하며, 미성년자 성적 대상화(‘좆린이’), 외모 차별 등을 답습한다는 점이라고 본다. 이는 다른 소수자들에게 억압적인 방식이라는 점만으로도 비판받아 마땅하다. 그리고 여기서 한 가지 더 유념할 점은, 성소수자, 장애인, 저소득층, 미성년자, 못났다고 여겨지는 외모의 소유자는 여성 내부에도 얼마든지 있다는 점이다. 따라서 다른 소수자들을 짓밟고서라도 여성해방을 이루겠다는 다짐—예컨대 워마드의 ‘도덕 버려’와 같은—은 논리적으로 모순이며 불가능한 열망이다. 여성을 단순화해서 하나의 동질적인 집단으로 바라보는 것은 정체성 정치에서 쉽게 발견되는 특징이지만, 여성해방에의 함의는 부정적일 수밖에 없다.
상대적으로 지적된 바 적은 두 번째 한계점은, 지금까지의 움직임들이 여성에 대한 문화적 부정의에 대한 문제제기에서 더 나아가 경제적 부정의까지를 통합적으로 이슈화하지 못했다는 것이다. 여성억압에 문화적 차원뿐 아니라 정치경제적 차원도 존재한다는 점을 상기한다면, 문화적 부정의에 대한 저항은 여성해방을 위한 필요조건이지만 충분조건일 수 없다. 지난 달에 ‘강남역 10번 출구’가 기본소득지구네트워크대회에 참석해 자본주의 가부장제 이성애 질서 안에서 여성들이 재생산노동의 역할을 강요당한다는 점에 문제제기하며 여성이 독립된 존재로서 온전한 시민권을 행사하기 위한 최소의 전제조건은 경제적 주체성을 획득하는 것이라 표명한 바 있다. 하지만 여전히 대다수는 여성에 대한 문화적 부정의에만 초점을 맞추고 있다.
인정 투쟁이 여성억압의 정치경제적 차원을 비가시화‧사소화한 사례는 최근 논란이 되었던 #나는_창녀다 해시태그 운동을 들 수 있다. 해시태그 운동을 주도한 측에서는 ‘창녀’라는 기표를 통해서 여성 전반에게 가해지는 문화적 무시와 경멸에 문제제기하고자 했을 것이다. 그러나 곧 성판매 여성들(즉, ‘창녀’ 당사자)의 고통에 대한 몰이해와 혐오라는 비판에 부딪혔다. 이에 해시태그 운동을 옹호하는 측은 “사회가 창녀/성녀 이분법을 통해서 여성을 통제하는 기제에 저항하고자” 했으며 “가부장제 사회에서 여성은 정도의 차이가 있을 뿐 성적인 대상으로 관음된다는 점에서 동일하고, 따라서 #나는_창녀다 라는 외침은 성노동 종사자를 향해 연대를 표명한 것”이라고 주장했다.
이는 ‘창녀’의 문제를 오로지 문화적인 차원에서만 접근한 것이다. 그러나 성매매 이슈의 본질은 오히려 정치경제적 차원에 있다. 전문지식 없는 비숙련 여성에게 다른 선택지를 남겨두지 않는 열악한 노동시장의 상황, 과거에 국가가 ‘외화 벌이’를 위해 주도적으로 육성해온 결과 영화 산업의 5배에 이르게 된 한국 성매매 산업의 규모, 조폭이 운영하고 경찰은 물론 검찰, 고위직 공무원, 정치인들이 뒤를 봐주는 고착화된 비리 등에 침묵한 채 성매매의 억압성을 논할 수는 없다. (성판매 여성에게 자발/강제 이분법을 들이대는 것이 무의미한 이유도 여기에 있다.) 이처럼, 여성에 대한 경제적 부정의를 간과한 상태에서는 여성해방을 위한 목소리가 여성에 대한 또 다른 배제와 소외를 낳을 수 있다. 경제적 부정의와 문화적 부정의 모두를 선명하게 드러내고, 두 가지에 통합적으로 문제제기하고 저항해야 한다.
메갈리아, 강남역 10번 출구, 생리대 이슈, 넥슨 성우 계약해지에 대한 반발.. 그동안의 침묵과 답보 상태가 놀라울 정도로, 많은 이들이 “여성혐오를 멈추라”고 목소리를 높였으며 이들의 움직임은 현재 진행형이다. 이들의 인정투쟁은 여성에 대한 문화적 부정의에 문제제기하고 저항했으며, 실제로 소라넷 폐지 등의 성과를 얻어내기도 했다. 그러나 동시에 정체성 정치로 빠지거나 경제적 부정의를 간과‧사소화함으로써 한계점을 드러냈다. 그렇다면 더 이상 ‘가만히 있’을 수 없는 우리들은 무엇을 해야 하는가? 어떻게 지금까지의 인정투쟁에 수반한 한계들을 극복할 수 있는가? 정체성 정치를 넘어선다는 것, 여성에 대한 문화적 부정의와 경제적 부정의를 통합적으로 문제제기한다는 것이 뭘 의미하는가?
집단 정체성에의 고착에서 벗어나기 위해, 인정투쟁이 전개될 양상을 지도할 목표를 부여하기 위해, 그래서 진정으로 여성에 대한 부정의들을 넘어서기 위해, 지금 필요한 것은 정의로운 전망이다. 여성해방이 정의로운 사회의 전망으로서 제시되어야 하는 것이다. 지금까지 한국사회에서는 여성운동 진영에서조차, 여성억압에 문제제기하고 저항했을 뿐 그런 노력들을 통해 궁극적으로 도달하고자 하는 사회의 상에 대해 논의되고 환류된 적이 없었다. 이제 더 이상 미룰 수 없다. 주류 남성중심적 사회에 균열을 낼 수 있다면 무엇이든 긍정하는 태도에서 벗어나, 균열과 해체 이후에 무엇을 생성하고자 하는지를 고민해야 한다. 여성이 해방된 사회, 젠더라는 억압기제가 사라진 사회, 성별 등에 무관하게 동등한 사회구성원으로 대우받는 사회, 따라서 보다 정의로운 사회를 그려내야 한다. 그런 유토피아를 적극적으로 꿈꾸어야 한다. 그리하여 현재의 뜨거운 열기가 향할 방향을 모색하는 것이다.
낸시 프레이저, 악셀 호네트 지음(2014), 김원식, 문성훈 옮김, 분배냐 인정이냐?: 정치철학적 논쟁, 고양: 사월의 책
낸시 프레이저 외 지음(2016), 케빈 올슨 엮음, 문현아 박건 이현재 옮김, 불평등과 모욕을 넘어: 낸시 프레이저의 비판적 정의론과 논쟁들(Adding Insult to Injury), 그린비
김원식(2009), 인정(Recognition)과 재분배(Redistribution) -한국사회 갈등 구조 해명을 위한 모색-, 사회와 철학 제17호
이현재(2014), 여성 빈곤의 세 가지 측면: 문화적, 정치적, 경제적 빈곤-낸시 프레이저의 정의론을 중심으로, 한국여성철학 제21권
김수아(2016), 우리 사회 ‘여성혐오’의 보편성과 특수성, 강남 ‘여성 살해’ 사건 관련 긴급 집담회: 대한민국 젠더폭력의 현주소 토론문
정희진(2016), “메갈리아는 일베에 조직적으로 대응한 유일한 당사자”, 한겨레 모바일(http://m.hani.co.kr/arti/society/women/754513.html)
진중권(2016), [진중권의 새論 새評] 나도 메갈리안이다, 매일일보 칼럼 (http://www.imaeil.com/sub_news/sub_news_view.php?news_id=36285&yy=2016)
천관율(2015), ‘메갈리안’… 여성혐오에 단련된 ‘무서운 언니들’, 시사IN LIVE (http://www.sisainlive.com/news/articleView.html?idxno=24350)
한국여성의전화(2016), 우리가 모이면 세상이 변한다, 베틀Ⅲ no.007, p.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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