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들은 시에 대해 양가감정을 느낀다. "왜요, 시 쓰시게요?" 대견하지만 한심하다는 뉘앙스. 아름다움을 다루는 고상한 일이지만 그곳은 삶의 참혹한 실상과는 무관한 세계가 아닌가 하는 감정. 그리고 저 학생[주인공 미자]과 교사는 그런 통념에 착실히 부합한다. 아직까지 그녀에게 시를 배운다는 것은 거실에 그럴듯한 화분 하나 갖다놓는 일과 다르지 않다. 시 한 편 써오르는 숙제를 받고는 사과를 만져보고 나무 그늘에 앉아보지만 그것은 오로지 자기 삶을 들여다보지 않기 위해서 할 만한 일들이다. 손자가 집단 성폭행에 가담해 한 소녀를 죽게 만들었다는 사실을 다른 학부형들을 통해 알게 되는 자리에서도 아직은 그랬다. 충격적인 사실을 듣고 그녀는 그 자리를 피하고 꽃의 아름다움으로 숨어버렸으니까. 그러나 상황은 달라지기 시작한다. 시가 삶을 피하자 삶이 시 안으로 밀고 들어온다.
이어지는 세 개의 장면들이 그렇다. 양미자는 죽은 소녀의 추모 미사에 참석하고, 샤워를 하면서 눈물을 흘리고, 집에 돌아와서는 손자를 붙잡고 신음한다. 그러면서 이 일들과 별개로 시를 쓰는 일이 불가능함을 자기도 모르게 조금씩 깨달아간다. 이제 시를 쓰는 일(아름다움의 발견)과 삶을 사는 일(속죄의 완수)이 하나로 포개진다.
(...)양미자는 모두가 회피하는 어떤 심연을 들여다보았고 죽음을 대가로 지불하고 그로부터 어떤 아름다움을 끌어낸다. 양미자의 윤리적 급진성이 거기에서 나온다. 그녀는 강사의 말을 '문자 그대로' 행하는 인물이다. 강사는 자신의 말이 도대체 어떤 결과를 낳을지 몰랐을 것이다. 대신 그녀만 유일하게 과제를 제출했다는 사실은 안다. "시를 쓴 사람은 양미자씨밖에 없네요." 나는 이 말이 영화 전체를 관통하는 일종의 선언이라고 받아들였다. 양미자밖에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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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과 악의 구분을 무너뜨리고, 강자와 약자 구도의 경직성 또한 흐트려 내면서, 예술적/미적 차원조차 삶과 분리된 채 내버려두지 않는. 이창동 감독은 가혹하리만큼 집요하게 미자로 하여금 내적 일관성을 견지하기 위한 고통스런 과정을 거치게 한다. 진정성의 소유자로서의 미자는, 결국 스스로 끌어안아 짊어진 고통과 함께 목숨을 끊게 된다. 이 죽음이 비극적임에도 슬프기만 하지 않은 것은 삶의 고통을 직면한 핏기어린 진실에는 아름다운 데가 있기 때문일 것이다.
이를 두고 "시가 삶을 피했더니 삶이 시 안으로 밀고 들어왔다"고, 그 결과 "그녀는 몸으로 쓴 시 한 편을 남겼다"고, 이 영화는 "거기서 더 나아가 '시란 무엇인가'라는 물음을 통해 '우리는 누구이고 이 시대는 어떤 시대인가'를 묻는", '시'를 "진정성(authenticity) 일반의 은유"로 사용한 작품이었다고 적을 수 있는 신형철의 능력도 또다시 놀랍다. 읽다보면 언어의 적확성에 가슴이 시큰해지는 일이 잦다.
2017.4.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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