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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평

이창동, 버닝(Burning) 낡았다. 엔딩 크레딧이 올라갈때 이 영화에 대한 나의 첫감상은 그러했다. 비단 젠더관에 그치는 평은 아니고, 15년쯤 전에는 전위적이었으나 이제는 식상해져버린 예술영화 같았달까. 플롯도 구도도, 좋게 말하면 클래식하고 실은 진부했다. 하루키의 83년도 소설을 옮겼으니 어쩌면 당연한 일일 수도 있으나. 이창동에게 기대했던 바에 미치지 못했던 것이 사실이다. 그런데도 며칠 간 계속 잔상이 따라다니는 걸 보면, 연출만은 대단했다고 인정하는 수밖에 없겠다. 대남방송이 항시 배경음악으로 깔리는 공간, 파주. 해질녘에 나와앉아 대마초 피우는 셋, 저마다의 표정. 가장 압권으로 꼽힐, 노을을 배경으로 그레잇헝거의 춤을 추는 해미. 종수가 조급하게 뛰어다니는 자욱히 안개낀 농촌길과 격렬하게 불타는 비닐하우스 이미지의 .. 더보기
[드라마] '나의 아저씨' : '키다리 아저씨'를 비틀어내다 '나의 아저씨'는 논란이 많은 작품이었다. 방영 전부터 주인공 커플의 나이차가 부각되어 뭇매를 맞았고, 제작사가 인물관계도를 수정하여 둘 사이 애정선을 지운 뒤에도 비판이 끊이지 않았다. 개별적인 씬의 연출이나 대사에 대한 문제제기도 있었지만, 주된 비판의 초점은 '처지가 훨씬 나은 40대 아저씨 옆에 최악의 현실에 처해있는 20대 여성을 붙여서 아재들이 자기위로하게 하는 드라마'라는 점인 듯 하다. "기득권 아재들의 피해자 코스프레"(황진미), "아재들을 위한 위무곡, 아재에게도 결례"(이승한), "'영포티' 판타지 재생산하는 게 예술?"(김종성) 등. 김종성은 한 발 더 나아가, "왜 굳이 45세 남성과 21세 여성이 서로의 삶을 치유해야 하나"라며 "SBS 에서 손무한과 안순진, 두 중년 남녀의 관.. 더보기
대안으로서의 농담과 축제: 밀란 쿤데라 『무의미의 축제』 대안으로서의 농담과 축제: 밀란 쿤데라 『무의미의 축제』 무의미 “쇼펜하우어의 위대한 사상은 말이오, 동지들, 세계는 표상과 의지일 뿐이라는 거요. 이 말은 즉, 우리가 보는 세계 뒤에는 어떠한 실재도 없다, Ding an sich 같은 것은 전혀 없다, 이 표상을 존재하게 하려면, 그것이 실재가 되게 하려면 의지가 있어야 한다, 그런 말입니다. 그것을 부과하는 막대한 의지 말이오.” “(...) 진짜 문제는 이거예요. 지구에 있는 사람만큼 세계의 표상이 있다는 것. 그건 필연적으로 혼돈을 만들지요, 이 혼돈에 어떻게 질서를 부여할까요? 답은 분명해요. 모든 사람에게 단 하나의 표상만을 부과하는 것. 그리고 그것은 오로지 의지에 의해서만, 단 하나의 막대한 의지, 모든 의지 위의 의지에 의해서만 부과될 .. 더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