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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평/문학

대안으로서의 농담과 축제: 밀란 쿤데라 『무의미의 축제』

대안으로서의 농담과 축제: 밀란 쿤데라 『무의미의 축제』



무의미

 

쇼펜하우어의 위대한 사상은 말이오, 동지들, 세계는 표상과 의지일 뿐이라는 거요. 이 말은 즉, 우리가 보는 세계 뒤에는 어떠한 실재도 없다, Ding an sich 같은 것은 전혀 없다, 이 표상을 존재하게 하려면, 그것이 실재가 되게 하려면 의지가 있어야 한다, 그런 말입니다. 그것을 부과하는 막대한 의지 말이오.”

“(...) 진짜 문제는 이거예요. 지구에 있는 사람만큼 세계의 표상이 있다는 것. 그건 필연적으로 혼돈을 만들지요, 이 혼돈에 어떻게 질서를 부여할까요? 답은 분명해요. 모든 사람에게 단 하나의 표상만을 부과하는 것. 그리고 그것은 오로지 의지에 의해서만, 단 하나의 막대한 의지, 모든 의지 위의 의지에 의해서만 부과될 수 있어요. 그걸 내가 했지요, (...)”

 

20세기 포스트모던의 사류는 우리에게 객관적 진리, 실체적 진실, 거대 이론, 유토피아에 대한 믿음이 환상에 불과하다는 것을 깨우쳤다. 동일성 논리의 무자비한 동화와 배제, 보편의 이름에서 행해지는 폭력들은 이전까지 인간의 삶을 공고하게 지탱해주던 외부의 의미부여 체계를 인간들 스스로가 뒤흔들어 무너뜨리도록 만들었다. 그리하여 무한한 자유를 획득한 기투하는 존재들은, 역설적이게도 고정된 의미의 부재로 인한 우울과 무기력, 타자와의 차이에서 비롯된 고독과 괴로움에 시달리고 있다. 이미 모두들 익히 들어 알고 있을 서술이다.

익숙하고 다소 진부한 분석인 만큼, 그간 이러한 세기적 공허를 타개할 방법에 대한 모색도 많은 이들에 의해 이루어졌다. 반복적으로 제기되었으며 다양한 답변이 이미 존재하는 중요하고도 어려운 질문에, 밀란 쿤데라가 내놓은 답변은 무엇일까. 위 인용구처럼 단 하나의 막대한 의지에 의한 단 하나의 표상을 만들고 이를 모든 사람에게 부과하는 것이 답이 아님은 분명하다. 고정된 진리가 어딘가에 존재한다는 믿음 없이 외부의 의미체계를 모든 이가 받아들이도록 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전자를 인정하면 사람들이 후자를 순순히 따르지 않을 것이고, 따라서 후자를 달성하기 위해서는 자신이 사람들에게 부과하고자 하는 의미가 객관적 진리라고 거짓말을 해야 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는 종국에 막대한 의지를 내고 있는 나 자신을 정당화할 근거를 찾지 못해인류진보는 존재하지 않으며, 동료들은 한심한 작자들이므로(스탈린이 그랬듯이)의지가 꺾이고 말 것이다. 역사의 수레바퀴를 절반쯤만 되돌려보려는 필사적인 타협책엔 실패가 예정되어 있는 법이다. 따라서 존경받아야 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것은 위인들이 아니라 칼리닌이다. “팬티를 더럽히지 않기 위해 괴로움을 견딘다는 것...... 청결의 순교자가 된다는 것... 생기고, 늘어나고, 밀고 나아가고, 위협하고, 공격하고, 죽이는 소변과 맞서 투쟁한다는 것...... 이보다 더 비속하고 더 인간적인 영웅적 행위가 존재하겠냐? 나는 우리 거리들에 이름을 장식한 이른바 그 위인이라는 자들은 관심 없어. 그 사람들은 야망, 허영, 거짓말, 잔혹성 걱분에 유명해진 거야. 칼리닌은 모든 인간이 경험한 고통을 기념하여, 자기 자신 외에 아무에게도 해를 끼치지 않은 필사적인 투쟁을 기념하여 오래 기억될 유일한 이름이지.” 쿤데라는 등장인물의 입을 빌어, 이러한 방식에서의 위인은 자기이익을 위해 움직이는 위선적 속물 혹은 지배계급의 이데올로기에 속아넘어간 헛똑똑이임을 분명히 한다.

그렇다고 쿤데라가 의미를 스스로 부여하는 행위를 통해 무의미를 극복할 수 있으며 주체로 거듭날 수 있다는, 순진한 실존주의적 답변을 내놓는 것은 아니다. 물론, 우리는 이미 살아버린 삶의 내용을 변화시킬 수는 없더라도 관점을 변화시킴으로써 이전과 다르게 새롭게 조명하고 가치를 재평가할 수 있다. 하지만 엄밀한 의미에서 말하자면, 결코 그렇지 않다. 왜냐하면 자신의 삶의 사건에 대한 관점의 변화가 의존하는 것은 주체의 의지가 아니라, 주체를 둘러싼 사회구조의 변화이기 때문이다. (백상현, 고독의 매뉴얼, p.28)” 미래를 상상할 때에도 마찬가지다. 미래의 이야기가 쓰이는 방식이 현재 우리의 정체성을 구성하는 사회적 언어와 조건들에 의해 한정될 것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러한 사회구조와 담론 질서는 당연하게도 권력에 의해 굴절되어 있다. 권력이라는 것이 가시적인 경성의 압박을 가할 뿐 아니라물론 이 방식도 여전히 빈번히 사용된다담론 체계라는 연성의, 그러나 강력한 도구를 통해 사람들을 옭아매고 있음이 드러난다. 그렇다면 의미부여하는 삶을 살고 있는 그 사람의 삶의 주인은 누구란 말인가?

존재의 질서는 쾌락-현실원칙의 질서이며, 우리 인간의 사유의 일반적인 경향은 이러한 존재 질서를 유지하도록 하는 구성주의적 사유에 길들여져 있다. 바디우는 이러한 생각은 전문적인 용어 없이도 얼마든지 접근 가능한데, 그것이 말하는 바는 결국 인간 존재의 소외를 의미하기 때문이다. 자신의 삶에서 주인이 되고자 하는 인간의 욕망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언제나 이미 존재하는 지식과 고정관념의 틀에 의존하는 경향을 따르고, 결국 타자의 욕망을 욕망하는 한계에 갇힌다. (...) 한편, 삶의 진정한 변화의 가능성을 가로막는 고정관념은 우리의 존재가 다양성의 파도 속으로 떠내려가지 않도록 지켜주는 것이기도 하다. 우리가 자신을 라고 부를 수 있는 것은 주입된 고정관념 덕분이다. 역설적이게도 우리의 존재는 우리 자신에 대한 이러한 편견으로 보호받는다. 편견, 미리 판단된 에 대한 지식은 나의 자아가 개방되어 흩어지는 위험으로부터 나를 방어하고, 한계 짓는다. (위 책, p.84-85)” 쿤데라는 이러한 속성 때문에 무거움과 가벼움 사이에서 줄타기를 하는 인간 유형을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에서 그린 바 있다. 토마시는 존재의 가벼움을 상징하는 사비나, 존재의 무거움을 상징하는 테레자와 관계맺는 과정에서 무언가자아, 의미 등 자신의 존재를 지탱해줄 것들를 생성하거나, 생성하지 못한다.

쿤데라는 이번 작품에서 고정관념과 애증의 갈등을 벌이는 데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간 것으로 보인다. 그는 적는다;

 

“ (...) 하찮고 의미 없다는 것은 말입니다, 존재의 본질이에요, 언제 어디에서나 우리와 함께 있어요. 심지어 아무도 그걸 보려 하지 않는 곳에도, 그러니까 공포 속에도, 참혹한 전투 속에도, 최악의 불행 속에도 말이에요. 그렇게 극적인 상황에서 그걸 인정하려면, 그리고 그걸 무의미라는 이름 그대로 부르려면 대체로 용기가 필요하죠, 하지만 단지 그것을 인정하는 것만이 문제가 아니고, 사랑해야 해요, 사랑하는 법을 배워야 해요,”

 

무의미를 있는 그대로 수용하는 것. 나아가 사랑하는 것. 그리하여 세계를 의미로 빈틈없이 매워야 한다는 강박으로부터 벗어나는 것. 여백과 공허와 소멸을 향유할 줄 아는 것. 자기 소외와 존재의 해체 사이의 딜레마에서 벗어나기 위한 방법으로 쿤데라가 제시하는 것이 바로 이 같은 것이다.

소설은 알랭, 샤를, 칼리방, 라몽 네 사람이 겪는 일상, 이들의 상념, 상상, 책에 담긴 스탈린의 일화, 그로부터 파생된 인형극 등이 혼재되어 서술된다. 단순히 대중 없이 오가며 에피소드가 삽입될 뿐 아니라, 이어지고 중첩되면서 이들 간의 경계를 흐리려는 시도가 반복적으로 행해진다. 상념의 내용은 친구들과 나누거나, 상상 속 인물(알랭의 어머니)과 대화를 나누는 등. 칵테일 파티에서 깃털이 맴돌기 시작했을 때부터는 네 친구들이 살고 있는 세계와 인형극의 세계가 점차 합쳐지더니 마지막 무의미의 축제에서는 하나의 세계로 수렴하는 모습도 보인다. 그 뿐 아니라 소설 속에서 쿤데라는 작가인 자신을 직접 소설에 등장시키기도 하고(옛 동료 둘의 만남은 그런 흐뭇한 몸짓으로 마무리되었다. 그러나 나는 무엇 때문에 다르델로가 거짓말을 했을까 하는 질문을 피할 수 없다. p.19), 등장인물의 입을 빌어 조물주의 위상으로 나타나기도 하는 등(라몽이 칼리방에게: “(...) 넌 헤겔이 누군지도 모르지. 하지만 우리를 만들어 낸 주인께서 나한테는 옛날에 그걸 공부하게 했단다.” p.98-99) 현실과 소설의 경계마저 허문다. 경계짓기, 구획으로 특징지어지는 기존 담론 질서바디우 백과전서적 지식의 시스템’, 백상현 고정관념에의 저항이며, 동시에 무의미에 대한 고찰이 관념적 고뇌 속에만 존재하는 것도, 소설 속에만 존재하는 것도 아님을 뜻하는 것이다.

 

 

죄 없는 이들의 고통

의미 부재의 고통과 의미 생성의 동력의 역설


바디우에 따를 때, ‘사건의 자리가 발생하는 것은, 세계의 안정된 질서-구조가 비틀리는 순간이다. 이때 현존 지식은 더 이상 삶의 변화들을 설명하여 상징화시킬 수 없다. 그런 의미에서 사건의 자리는 균열 그 자체라고 할 수 있다. 이제껏 선명하게만 보였던 삶의 질서가 하나의 미스터리처럼 불투명해지는 순간, 우리는 사건의 자리가 형성되고 있음을 알게 된다. 그러나 이러한 균열의 벌어짐은 언제나 다시 봉합될 운명을 가진다. 사유의 이 같은 방어적 경향에 의해서 다시 폐쇄되는 사건을 구해내는 것이 주체성이다. 누군가 사건의 자리에 개입하고 사건을 명명하면, 이제 사건은 하나의 이름으로, 그러나 아직은 받아들여질 수 없는 유령의 이름으로 상황 내의 요소들 사이를 떠돌기 시작한다. (백상현, 고독의 매뉴얼, p.93-94)”

 

영화 한공주밀양을 보고나서, 죄 없는 자들의 고통에 대해 생각했다. 납득할 이유도 복선도 없이 밀고들어와 삶을 파괴해버리는 트라우마적 사건. 이를 겪은 자들의 고통은 무엇에서 연원하는가를 생각했다. 그들혹은 우리이 회복되기 위해서는 무엇이 필요한지를 생각했다. 이들의 고통은 일차적으로는 그동안 믿어왔던, 나름대로 합리적이고 어느 정도 정의로운, 그래서 살아갈 만한 세상에 대한 신뢰가 깨졌다는 데에 있다. 외부로부터 주어진 의미체계가 산산히 부서진 것이다. 인간은 의미 없이는 생존할 수 없기에, 이들은 매일의 삶을 영위하는 것조차 위태롭다. 이 때, ‘윤리와 같은 기존 담론 질서는 가해의 가벼움과 피해의 무거움 사이의 간극을 통해 피해자를 벌한다. 가해자에게 부과된 사회적 죄의 무게에 비견했을 때, 고통은 압도적으로 파괴적이고 심원하다. 상처의 고통에 상응하는 분노와 원망을 품으면 그것은 언제나 가해자의 죄를 훌쩍 상회하게 되는 것이다. 그렇다면 피해자에게 남는 선택지는 몇 없다; 자신의 고통경감을 위해 타인을 부당하게 공격하는 이기주의자가 되거나, 별거 아닌 일에 큰 상처 받은 예민하고 나약한 자가 되는 것. 이기주의자도, 자기 고통에의 연민에 빠진 자도 되지 않으려면 스스로의 욕구를 외면하고 감정을 부인해야 한다. 많은 피해자들의 자책은 여기에서 비롯된다고 본다.

앞서 논하던 질문을 이어가보자. ‘순진한 실존주의자를 넘어서려면, 의미부여의 과정에 필연적으로 수반되는 기존 담론 질서의 구속력을 인지하고 이에 저항해야만 한다. 이 작업에서만이 불완전하게나마 주체의 자리가 허락되기 때문이다. 체제 지속적이지 않은 무언가가 창조되고 새로움이 만들어지는 순간은 충동적 행동, 혹은 이와 같은 저항의 행위를 통해서만 도래한다. 그렇다면 죄 없이 고통 받는 자들은 이 같은 작업을 행하기에 인식론적 우위에 놓여있다고 할 수 있다. 자신의 고통에 대한 설명의 부재는 의미 없이 살아갈 수 없는 인간 존재가 스스로 의미를 찾아 나서게끔 하는 원동력이 될 것이며, 기존 담론 질서가 자신과 대립되어 있기 때문에 현사회가 부여해주는 의미에는 결코 만족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렇듯 세상에 없는 새로운 것을 만드는 작업은 고되고 고독한 작업일 수밖에 없다. 윤리가, 옳음이 나의 투쟁대상이라면 투쟁하는 나의 결정을 정당화하는 근거를 윤리와 옳음으로부터 제공받을 수 없기 때문이다. 비단 윤리에 국한되지 않더라도, 보편적 지식의 도움 없이 이 작업을 해내는 과정은 세계와의 단절과 대립을 감수하는 일이 된다. 그래서 고통받는 자들은 고통의 한가운데에서 고독하기까지 하다. 백상현은 고독의 매뉴얼에서 이와 같은 싸움을 긍정하고 고독에 가치를 부여한다. “주체는 고독의 절차화이다. (...) 이것은 세계와의 대결을 의미하며, 고립을 의미하며, 단절을 의미한다. 누구도 금지된 사랑에 매달린 두 사람을 동정하지 않는다. 누구도 도청을 사수했던 그들의 죽음을 이해하려 하지 않는다. 누구도 갈릴레이의 미친 지동설을 믿지 않는다. 귀를 자른 화가의 작품을 아무도 사지 않을 것이다. 그럼에도, 고독 속의 그들은 당신들의 평범함을 부러워하지 않는다. 미래는 그들의 것이었기 때문에. (p.116)”

그럼에도 과연 이런 삶을 더 나은 것이라 옹호할 수 있을까에 대해 나는 답변하지 못하겠다. 이들의 삶은 분명 비참하고 고통스럽다. 그리고 의미를 찾으려는 이들의 시도는 대부분의 경우 실패한다. 한 인간으로서 짊어지기에 버거운 임무였기 때문이라 생각한다. 무너지고 부서지고 주저앉는다. 의지가 될 것 같은, 그러나 실은 그럴 수 없는 것이라는 것을 스스로도 내심으론 아는, 얄팍한 것을 움켜잡으려 애쓴다. 그리고 예정된 허무를 맛본다. 다만 나는, 이런 삶을 사는 것이 선택의 문제가 아님을 알았다, 고 말할 수 있을 따름이다.

 

 

사랑(관계, 연애), (자아실현, )

그럼에도 남겨지는 주체의 고독을 완화하고자 하는 시도들

 

(...) 그렇게 공통 관심사가 거의 없는데도 그들이 어떻게 언제나 그렇게 한참, 또 즐겁게 이야기를 나누는지 이해하기는 어렵다. 역사 속 서로 다른 지점에 세워진 전망대에서 사람들은 서로 알아듣지 못하는 말을 한다고 라몽이 자기 이론을 피력했을 때, 알랭은 즉각 자기 여자 친구를 떠올렸는데, 정말 사랑하는 연인들이라 해도 서로 태어난 날이 너무 멀리 떨어져 있으면 그들의 대화란 서로의 독백이 대부분 이해되지 못한 채 그저 뒤얽힌 것일 뿐임을 여자 친구 덕분에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바로 그래서 그는 예를 들면 마들렌이 유명한 옛날 인물들의 이름을 한 번도 들어 본 적이 없어서 틀리게 발음하는지 아니면 자기가 태어나기 전에 일어난 일에는 조금도 흥미가 없다는 것을 모든 사람이 알게 하려고 일부러 패러디하는 것인지 전혀 알지 못했다. 알랭은 그것이 거북하지는 않았다. 그런 그녀와 같이 있으면 재미있었고, 그러고 나서 집에 돌아와 혼자가 되면 벽에 걸린 보스, 고갱, (또 누구인지 모를 이)의 복사판 그림들이 만들어 주는 그 자신만의 세계에서 더 편안함을 느낄 수 있었다.

 

예전에 사랑은 개인적인 것, 모방할 수 없는 것의 축제였고, 유일한 것, 그 어떤 반복도 허용하지 않는 것의 영예였어. 그런데 배꼽은 단지 반복을 거부하지 않는 데서 그치지 않고, 반복을 불러, 이제 우리는, 우리의 천년 안에서, 배꼽의 징후 아래 살아갈 거야. 이 징후 아래에서 우리 모두는 하나같이, 사랑하는 여자가 아니라 배 가운데, 단 하나의 의미, 단 하나의 목표, 모든 에로틱한 욕망의 유일한 미래만을 나타내는 배 가운데 조그맣게 난 똑같은 구멍만 뚫어져라 쳐다보는 섹스의 전사들인 거라고.”

 

(...) 자기가 좋아하는 일을 하면서 (그런데 자신이 무슨 일을 좋아하는지 알기는 하는 걸까? 밥벌이를 할 수는 없으리라는 것을 잘 알았기 때문에 그는 학업을 마친 후, 자신의 독창성이나 생각, 재능이 아니라 다만 지능, 즉 산술적으로 측량 가능한 능력, 각 개인들에게서 오로지 약적으로만 구분되는, 어떤 이는 더 있고 어떤 이는 덜 있는, 알랭은 더 가지고 있는 편인 그 능력을 발휘해야 하는 직업을 선택했고, 그리하여 월급을 많이 받았으며 때때로 아르마냐크 브랜디를 살 수 있었다.

 

사랑과 일. 이 두 가지는 선택할 수 없음을 수용하고도 남겨지는, 견디기 어려운 주체의 고독을 완화하기 위해 사람들이 가장 많이 의지하려 하는 것들이다. 그러나 쿤데라는 이 두 가지가 쉬운 답이 될 수 없음을 가벼운 어조로 당연하다는 듯이 선언해버린다. 알랭은 관계나 일로부터 자신의 존재 의미를 제공받으려는 노력을 의도적으로 선택하지 않은 것으로 등장한다. 그에게 관계는 함께 있는 순간 나의 존재에게 제공되는 재미, 일은 내 존재의 물질적 유지를 위한 돈벌이로서 평가되고, 알랭은 이 같은 자신의 삶에 나름대로 만족하며 살아가는 모습이다. 가닿을 수 없는 타자와 일체화되기 위한 노력들이 무수히 좌절됨을 기억하라. 타인의 욕망과 전적으로 무관하면 돈벌이로서의 기능을 완전히 상실하고, 그렇지 않으면 의 꿈이 아니기에 꿈을 꾸고 실현하는 과정에서 스스로 소외될 수밖에 없다는 자아실현의 딜레마를 생각하라. 완전한 포기가 가능한지는 의문스럽기는 하나, 사랑도 일도 결코 고독한 주체에게 안정적인 안식처의 역할을 해줄 수 없다.

 

 

cf) 사랑(관계)과 일(자신의 꿈)의 관계에 대해서: 라라랜드

둘은 함께일 수도 있었다. 그러나 남자와 여자는 둘보다 하나를 택했고, 사랑보다는 꿈을 택했다. 같이 보낸 네 계절은 분명 달콤했다. 하지만 이제 그 시간은 지났다. 사랑에 대한 이야기로 보면 새드엔딩이지만, 꿈에 대한 이야기로 받아들이면 결국 둘 모두 성공하게 되는 결말은 해피엔딩일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이건 꿈을 향해 달려가야 한다고 역설하는 영화가 아니다. 꿈을 향해 달려가다보면 관계는 망실된다고 암시하는 영화다. 선택이란 하나의 성취보다는 다른 하나의 포기를 의미한다고 읊조리는 영화다. <위플래쉬>에 이어 음악영화를 계속 만들면서도 음악()과 삶(관계)을 구분 짓고 끝내 양립불가능한 것으로 그려내는 데미언 채즐의 비관주의는 기이하고 아프다. (이동진 영화평론가)”

 

영화 소개에는 다음과 같이 적혀있다. 인생에서 가장 빛나는 순간 만난 두 사람은 미완성인 서로의 무대를 만들어가기 시작한다, . 그러나 서로의 꿈꾸는 모습에 끌려 아름답게 사랑했던 연인이 바로 그 꿈 때문에, 그 꿈을 완성시켜나가는 과정에서의 변화들 때문에 멀어진다면. 내 삶에서 한걸음 전진하기 위해 소중한 인연들과의 멀어짐을 감수하는 것이, 나에겐 비정하고 눈물겨운 일이라서. 환상적인 로맨스라는 소개문구들이 무색하게도 영화관람 후에 못견디게 슬퍼져버렸다. 라라랜드를 빛나던 한때의 추억으로 거리낌없이 흐뭇해하기엔, 어느누구와의 얼마나 깊은 사랑도 지속가능하지 않다는 사실이 외롭고 위태롭다. 이 또한 홀로됨에 머물줄 모르는 내 어리고 나약한 마음인 건지. (2016.12.23.)

 

 

농담

 

칼리방은 잠시 가만히 있다가 말했다. “이 이야기에서 딱 하나 믿기지가 않는 건 스탈린 말이 농담이라는 걸 아무도 몰랐다는 거야.”

그렇지.” 샤를이 이렇게 말하며 탁자 위에 책을 내려놓았다. “왜냐하면 그 주위 누구도 농담이란 게 뭔지 알지 못하게 됐으니까. 나는 바로 여기에서부터 새로운 역사의 위대한 시기가 도래한 거라고 봐.”

 

그렇다면 쿤데라가 말했듯, 무의미를 있는 그대로 수용하고 이를 넘어 사랑하는 것이 유일한 해결책일까. 고독한 주체의 고통을 조금이라도 완화하는 것은 존재의 본질이 무의미라는 점을 직시하면서도 이를 의미로 가득 채워내지 않아도 된다는 여유의 자세일까.

무의미를 사랑하는 것의 구체적 방법으로 쿤데라가 소설 속에서 제시하고 있는 것은 농담이다. 그는 농담의 황혼, 장난-후의 시대의 도래를 문제적 상황으로 지적하고 다만 세상을 진지하게 대하지 않는 것만이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이라고 말한다. 그가 말하는 농담은 조롱이나 패러디, 블랙유머가 아니라 무한히 좋은 기분에서 비롯된 행위이다. 예상치 못한 경로로 진행되는 이야기, 그러한 주체의 의미부여, 곧바로 이어붙는 그 의미부여에 대한 사소화. 이것이 농담의 특징이다. 쿤데라적 의미의 농담은 전위적이면서 비폭력적인 담론적 실천을 지칭하는 것으로 보인다. 소설 전체를 관통하는 혼돈과 가벼움의 정서는, 쿤데라가 소설 속 특정 대사나 서술을 통해서 뿐 아니라 소설 전체를 통해 무의미에 대처하기 위해선 무의미를 축제로 만들어버리라고 말하고 있음을 드러낸다.

 

 

 



밀란 쿤데라, 방미경 옮김, 무의미의 축제, 민음사, 2013

백상현, 고독의 매뉴얼, SFP-위고, 20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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