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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평/평론

말 얹는 자의 윤리

연대와 지지의 말인지 비판의 말인지, 결론의 방향은 오히려 덜 중요해보이는 때가 있다. 말이 너무 쉬운 사회에서 말로 먹고 사는 사람들의 윤리에 대해서 생각하게 된다. 침묵하거나 방관하지 말고 개입하세요, 라는 요구의 반대 끄트머리에서 함부로 내뱉기보단 말을 아끼는 것의 미덕에 대해서. 나는 가보지 않은 현장에 대해 말할 때 머뭇거림이 없는 사람, 살아보지 않은 삶에 대해 말할 때 심경이 복잡해지지 않는 사람을 신뢰하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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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년 위안부 운동’ 마치 끝난 듯 평가 말자

김영희



"'할머니’의 말을 들어라, 그의 말을 존중하라고 말하는 사람들이 가장 먼저 ‘대리 발화’에 나섰다. ‘할머니’의 뜻이 무엇인지 자신의 언어로 설명하고, 평가하고, 그 속에 담긴 진의가 무엇인지 가르치려 들었다. 오직 자신만이, 혹은 자신들만이 ‘할머니’의 말에 담긴 속뜻을 가장 정확하게 알고 있다고 자신하는 이들은 어항 속의 물고기를 위에서 아래로 내려다보는 사람처럼 사태를 관조하는 위치에 있었다. 어항 속에서 벌어지는 일은 그들에게 ‘나의 일’이 아니며 어항 속에서 벌어지는 일들에 대한 책임 역시 그들에게 있지 않다. 잘못은 ‘저들’의 몫이며 ‘나’는 윤리적인 인간이기에 그들은 윤리를 가장하는 온갖 수사를 동원해 ‘당사자의 말을 존중해야 한다’고 말한다. 그들에게는 당사자가 아닌 위치에서 당사자의 말을 존중하며 당사자의 말을 대리 발화하는 것이 ‘윤리’인 것이다.

그러나 나는 말에 앞서 해석이 존재했다고 생각한다. 어떤 말이 드러나기에 앞서 이 말은 어떤 식으로 해석될지 그 운명이 정해져 있었다. 이용수씨와 윤미향씨의 말이 있기에 앞서, ‘정의연’과 ‘일본군 위안부’ 문제에 연대해온 이들의 말이 드러나기에 앞서 이 말들은 이미 구축된 진영의 스펙트럼 안에서 각자의 위치를 갖게 될 어떤 계획 아래 포섭되어 있었다. 이 계획은 정확하게 타자화의 폭력을 구현한다. 누군가를 규정하고 어떤 편견에 가둬 옴짝달싹 없이 묶어둔 채 공격하려 할 때 가장 먼저 실행하는 일은 대상을 축소하고 고정하는 것이다. 그리고 그 축소되고 고정된 속성은 대상 고유의 것으로 본질화하며, 그 밖의 모든 것들은 타자화의 폭력에 의해 앞서 규정된 내용으로 환원된다. 이럴 때 사태는 단순화되며 맥락의 두께는 얄팍하게 평면화된다."

"나도 내가 보탠 이 한마디 말의 효과가 두렵다. 인터넷 댓글이 두려운 것이 아니라 내가 알지 못하는 것들에 대해 아는 것처럼 말하는 것이 두렵고, 내가 한 말이 이 담론장 안에서 어떤 정치적 효과를 만들어낼지 가늠할 수 없어 두렵다. 그러나 두려움 속에서도 한마디 말을 꺼낸 것은 침묵의 이유를 말하고 싶어서다. 지난 반세기 ‘할머니’들의 침묵을 만들었던 폭력은 여전히 성찰되지 않은 채 지속되고 있다. ‘내가 더 잘 안다’고 앞다투어 말을 내놓는 사람들 뒤로 무수히 많은 사람이 할 말을 하지 못한 채 침묵하고 있다. 나는 이 침묵을 대리할 수 없지만 나의 마음을 미루어 조심스럽게 짐작한다면 분명 사람들의 말문을 닫게 하는 고통과 분노가 있을 것이다. 언제나 엄청난 고통의 흔적을 남긴 애초의 폭력은 지워지고 그 고통의 흔적 때문에 제대로 생각하고 제대로 쉴 수 없었던 사람들이 서로를 비난하는 일이 반복된다는 것, 그리고 애초의 폭력을 방관하거나 공모했던 이들이 이 싸움을 멋대로 평가하고 재단하는 일이 반복된다는 사실을 나는 견딜 수가 없다. 무엇보다 지금 논쟁에 참여한 이들 가운데 상당수는 마치 ‘끝난 싸움에 대해 평가하듯이’ 말하거나 ‘싸움이 끝난 후 결실을 두고 다투는 이들을 힐난하듯이’ 말하지만, 침묵하는 이들에게 이 싸움은 전혀 끝나지 않은 일이다. 침묵을 뚫고 분명하게 말하지만 그것은 30년 전에도, 지금도 오롯이 ‘현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