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뷰/논문

정동affection으로 여성운동하기? : '여성 혐오'와 저항의 딜레마

Utopian 2018. 3. 27. 16:34


  최근 한국사회의 역동을 설명함에 있어서 '감정' 혹은 '정서emotion' '정동affection'에 대한 관심이 높다. 물론 이것은 비단 한국에만 국한되는 흐름은 아닐 것이다. 1990년대 초반에서 중반 무렵부터 서구의 몇몇 비평이론가들과 문화비평가들은 후기구조주의와 해체주의의 흐름이 '언어학적 선회'를 만들어내며 포스트모던의 본격화를 알렸듯이, 이제는 '정동적 전회'의 시대라고 선언한 바 있었다. 정동과 정서로의 전회는 언어학적 선회 이후 시작된 문화, 주체성, 정체성, 몸에 대한 논의들에 대한 비판적 대안이자 확장이라고 의미부여되었다. 김홍중(2013) 또한 "20세기 후반에 사회학에 등장한 다양한 새로운 경향 중에서 가장 큰 주목을 요하는 것 중의 하나가 바로 '감정'에 대한 새로운 시각(8)"이라고 적었다.

  그러나 근래 한국사회를 시끌시끌하게 했던 일련의 사건들, 표면으로까지 터져나와 설명을 요구했던 현상들이 그러한 이론적 관점을 '불러들인' 측면도 분명 존재한다고 보인다. 정식으로 통계를 내본 것은 아니지만, 감정이나 정동에 관한 이론서들 중 일베, 메갈리아 등이 등장한 이후에 번역되어 출간된 경우들이 많이 눈에 띄었다. 급격히 대두된 사회적 문제를 당면한 상황에서, 설명할 언어에 대한 수요가 있었다는 방증 아닐까. 그렇게 생각해본다면 가장 설명을 강력하게 요구하고 있는 문제적 영역의 중심에 있는 것은 '혐오'라는 정동일 것이다. 특히나 '여성 혐오'는 일베의 여러 병리적 특성 가운데 하나가 아니라 일베가 벌이고 있는 문제적 실천의 기초를 이룬다는 점(윤보라 2013), 메갈리아의 등장 이후 '남성 혐오' '양성 갈등' 심지어는 '젠더 전쟁'이라는 단어들을 만들어내며 뜨거운 논란거리가 되었다는 점, 메갈리아에서 갈라져나왔으나 게토화된 워마드에서 다시금 소수자혐오가 재생산되고 있음이 비판의 대상이 되고 있는 점 등에서 탐구되어야 할 부분이다.

  이에 유관 논문이나 글 등을 이 곳에 정리하여 둔다. 선정기준이 자의적일 뿐 아니라, 정리한 글들을 관통할 만한 본인의 통찰이랄 것이 아직은 정립되지 않은 상태여서, 정리정돈이 덜 된 책꽂이 정도로 생각해주면 좋겠다.



1. '여성혐오(misogyny)'는 '여성 혐오'가 아니다?

  메갈리아의 탄생이 우에노 치즈코의 저서 『여성혐오를 혐오한다』가 많이 읽혔던 시기와 맞물려서였는지, 일베의 실천양식이 '혐오'라는 단어로 잘 설명될 수 있는 속성의 것이었기 때문이었는지 모르겠지만, 그 국면에 가장흔히 볼 수 있는 온라인 논쟁은 이런 것이었다. "이것도 여성혐오"라고 문제제기하면 "나는 여자를 좋아하는데 왜 여성혐오를 한다고 그러냐"고 반문하고, "여성혐오는 그런 것이 아니다(공부 좀 하고 와라)." 하는 것. 이 맥락에서 '여성혐오'는 거의 '성차별'과 동의어라고 할 만큼 광의의 개념으로 통용되는 듯 했다. 의미 혼동 때문에 혼란이 빚어지자  "'여성혐오'는 '여성 혐오'가 아니다?" 와 같은 글들이 쓰여지기도 했다. 학술적 용어로 일찍부터 쓰이기 시작했던 '여성혐오(misogyny)'는 누군가를 아주아주 싫어한다는 뜻의 혐오가 여성을 대상으로 했음을 의미하는 '여성 혐오'와는 달리 '여성을 동등한 인격체로 보지 않는 모든 행위와 시선'이라는 것이었다.

  하지만 이미 '성차별'이라는 어휘가 있는 상황에서 굳이 '여성혐오'를 사용할 경제성이 없다는 주장은 차치하고라도, 이런 의미에서의 '여성혐오'라면 더 이상 감정이나 정동에 관한 개념이라고 보기 어려워져 버린다. 또, '혐오'에 대한 우리사회 공통의 문제의식이 최근 두드러지기 시작한 새로운 현상에 대한 주목이라고 할 때, 지나치게 광의의 개념인 '여성혐오'는 고래로부터 계속되었을 여성억압의 다른 이름이기 때문에 적합한 설명을 제공하지 못하게 된다. 따라서 아래에서 정리한 글들은 일견 협의의 여성 혐오라고 부를만한, 감정 혹은 정동으로서의 혐오가 드러난 사례들에 대한 분석 글들로 한정하였다.


2. 새롭게 주목하는 '정동'이란?


*멜리사 그레그 & 그레고리 시그워스 편, 정동 이론 : 몸과 문화·윤리·정치의 마주침에서 생겨나는 것들에 대한 연구, 갈무리, 2015


<서문> 그레고리 시그워스, 멜리사 그레그, “미명의 목록[창안]”

결국, 정동이라는 것에 순수한 상태나 어떤 근원적인 상태가 전혀 없다면 어떻게 시작해야 할까? 정동은 사이in-between-ness의 한가운데서, 즉 행위하는 능력과 행위를 받는 능력의 한가운데서 발생한다. 정동은 순간적인, 그러나 때로는 좀 더 지속적인 관계의 충돌이나 분출일 뿐 아니라, 힘들과 강도들의 이행passage(혹은 이행의 지속)이다. 즉 정동은 몸과 몸(인간, 비인간, 부분-신체, 그리고 다른 것들)을 지나는 강도들에서 발견되며, 신체와 세계 들 주위나 사이를 순환하거나 때로 그것들에 달라붙어 있는 울림에서 발견된다. 그리고 바로 이러한 강도와 울림 들 사이의 이행과 변이 들 그 자체에서 발견된다. 가장 의인화된 방식으로 말하자면 정동은 의식화된 앎 아래나 옆에 있거나, 또는 아예 그것과는 전반적으로 다른 내장의visceral 힘들, 즉 정서emotion 너머에 있기를 고집하는 생명력vital forces에 우리가 부여하는 이름이다.(14)” [강조는 원문]


의심할 바 없이 정동과 관련해 가장 자주 인용되는 말 중 하나인 바루흐 스피노자의 주장은, “누구도 몸이 무엇을 할 수 있는가를 아직 규정하지 못했다는 것이다. 여기서 즉시 두 가지 핵심적인 측면을 강조 또는 재차 강조해 둘 만하다. 첫째는 하나의 몸의 능력은 결코 하나의 몸으로만 규정되지 않으며, 항상 그것의 힘-관계들의 장혹은 맥락의 도움을 받으며 그에 의해 부추겨지고 또한 그것들과 긴밀한 연관을 가진다는 사실이다. 두 번째는 몸을 아는 것아직 아님not yet’은 스피노자가 에티카를 지은 지 330여 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여전히 우리에게 중대한 의미를 지닌다는 점이다. 그러나 스피노자도 인정하듯이, 이 문제는 결코 신체’(모든 신체)를 일반적 특성으로 가늠하는 것genetic figuring이 아니라, 훨씬 더 독특하게, 하나의 몸과 그것의 정동들/정동됨을 구성하려고 애쓰는 것, 그 몸이 계속 진행하는 하나의 세계의 정동적 합성을 구성하려고 애쓰는 것, 하나의 세계와 하나의 몸의 바로 이것-this-ness을 구성하려고 애쓰는 것이라 할 수 있다.

이 책의 글들은 각각 나름의 방식으로 이러한 몸의 정동적인 행함doing과 무화undoing아직 아님에 대해 다루고자 하는 시도들이다.(17-18)” [강조는 원문]


<9장> 페트리샤 T. 클라프, “정동적 전회 : 정치경제, 바이오미디어, 신체들

"어쨌거나 정동과 정서는 후기구조주의와 해체주의가 그러했듯이, 주체 내의 자신과의 불연속성과, 주체의 의식적 경험과 정서와 정동의 비지향성과의 불연속성에 주목했다. 그렇지만 또한 정동적 전회는 비평이론과 문화비평을 신체적 물질로 되돌렸다는 점에서 실질적인 변화를 제시했다고 할 것이다. 신체적 물질bodily manner은 그때까지 후기구조주의와 해체주의의 영향 속에서 다양한 구성주의적 관점에서 다루어지고 있었는데, 이와는 달리 정동적 전회는 신체적 물질과 물질 일반에 내재한 역동주의, 즉 물질이 정보가 되면서 자기조직화하는 능력에 주목하였다. 이 점이 정동적 전회가 한 가장 도발적이고 영구적인 기여라고 나는 주장하고 싶다.

그러나 정동으로 돌아선 많은 비평가와 이론가가 정동에서 정서로의 회로에 초점을 맞춘 가운데 결국 주관적으로 느껴진 상태의 정서로 끝나는 경우, 즉 정서적 주체로서의 주체로 환원하는 경우가 종종 있었다. 이와 달리 나는 질 들뢰즈와 펠릭스 가타리, 바루흐 스피노자, 앙리 베르그손의 영향하에, 신체의 행동하는 능력을 증강하거나 감소하는 전前개체적인 신체의 힘으로 정동을 개념화하는 비평가 및 이론가, 또 정동의 지각되지 않는 역동주의를 파악하거나 조작할 수 있게 만드는 테크놀로지에 비판적으로 참여하는 비평가 및 이론가에 주목하고자 한다.(333-334)"


"정동을 잠재성의 철학적 개념화와 연결하는 중요한 논문에서, 브라이언 마수미는 정동을 신체적 반응, 자율적 반응으로 정의하는데, 이는 곧 의식적 지각의 상태를 넘어서서 지각에 앞서는 "내장의 지각visceral perseption"을 말한다(마수미 2002). 그러나 자율반응에 대한 언급이 정동을 신체효과의 경험적인 측정과 같은 것으로, 즉 동공 확장이나 장 연동, 선 분비, 피부 경련을 말하는 것처럼 보이게 할지라도, 마수미는 이 측정들을 철학적인 탈출구로 사용하여, 정동을 잠재성의 측면에서, 미결정적으로 생겨나는 경향이나 발아행위로서, 살아질 수 없는 잠재력의 영역으로 생각한다. (...) 마수미에게 몸의 미결정성에 주목하는 것은 "전前-사회적" 몸으로의 회귀가 아니다. 정동을 전-사회적인 것으로 오해해서는 안 된다고 주장하면서, 마수미는 정동이 "무한히 사회적"이라고, 즉 "개인들[과 집단들]의 분리 '이전의' 방식으로 사회적"이라고 말한다(2009, 9)."


3. '여성 혐오'의 정동에 관한 국내 논문들

정동에 관한 관심이 특정 감정양식을 여타 사회와 분리되는 특정한 집단 혹은 개인의 것으로 개인화한다면, 위에서 페트리샤 클라프도 적었듯이, 정동 이론의 외피를 입었다 해도 주체-정체성 정치 담론의 한계를 넘어서지 못할 것이다. 워마드 현상, TERF 논쟁 등, 우리는 이미 여성 혐오와 관련해서 정체성 정치의 한계가 뚜렷히 드러나는 사례들을 목도하지 않았나. 게다가 정동의 개인화는 최악의 경우에는 심리학적 탐구에 머무르며 사회적 분석을 해내는 데에 무력하게 되어버릴 수 있다.

아래에는 '여성 혐오'의 정동을 사회적인 차원에서, 전사회적 맥락, 역사적 풍토, 다른 정동들 등과의 연결성 속에서 논의한 윤보라(2013), 손희정(2015a, 2015b)의 글을 요약해보았다. 세 글은 공히 여성 혐오에 대한 일견 단호한 처단이, 어쩌면 그러한 여성 혐오를 낳은 배경에 복무하게 될 지 모른다는 경계심을 담고 있다. 혐오와 저항의 딜레마라고 할 만 하다.


*윤보라, 일베와 여성 혐오 - “일베는 어디에나 있고 어디에도 없다, 진보평론, 2013

 

필자는 현재 일베 현상을 다루는 비판적 담론 속에서 여성 혐오가 일베의 여러 병리적 특성 가운데 하나로만 인식되고 있지만, 실제로는 일베가 벌이고 있는 문제적 실천의 기초를 이룬다는 점에서 주의 깊게 성찰해야 한다는 문제의식으로 시작한다. 또한 일베에서 발견되는 여성 혐오는 갑자기 등장한 것이 아니라 사이버 공간에서의 여성 혐오 역사와 매우 밀접한 관계가 있기 때문에 주의 깊게 들여다 볼 필요가 있다.

 

여성에 대한 총체적 거부

<일베리포트(www.ilbe.coroke.net)>에 따르면, 일베에서 씨발, 존나를 제외하고 가장 많이 언급된 주제어는 여자이며 세 번째 주제어인 노무현의 두 배에 달한다.

구조화된 청년 실업은 해결될 기미가 보이지 않는데 모든 것을 개인의 경쟁과 성과에 종속시키는 신자유주의 논리 속에서, 스스로를 잉여라 조롱하는 루저문화는 청년세대가 모인 대다수 온라인 공간에서 성별을 막론하고 통용되는 코드로 자리 잡았다. 주목해야 할 것은 루저문화 안에 스민 젠더 관계이다. 여성들의 루저문화가 주로 젠더 권력 관계를 비틀고 가부장적 질서가 자신들에게 부여한 규범을 배신하는 것으로 드러나듯이 남성들의 루저문화도 규범적 남성성의 해체에 집중한다. (,,,) 그러나 불행하게도 루저문화를 통한 새로운 남성성의 협상은, 적어도 일베의 사례에서는 실패한 것으로 보인다. 안상욱(2011:110)이 우려한 바와 같이 과거 남성성과의 불이치가 장기간 해소되지 않은 상황에서 이들의 패배감은 여성에 대한 폭력을 극단화하는 방식으로 드러나 버렸다.(38)”

필자는 일베가 사용하는 어휘의 과격함을 걷어내 보면, 일베 내 여성 혐오를 작동시키는 구조가 실은 우리 사회에 내재된 모종의 의미구조를 정확히 반영한다고 보았다. 이는 다음과 같다:

.            여성부와 페미니스트라는 약탈자

.            ‘된장녀에서 김치년으로 : 일부 된장녀전체 김치년

.            여성=진보

 

일베는 어디에나 있고 어디에도 없다

일베는 여성 혐오의 원인이 아닌 증상이다. 그렇다면 우리 사회는 어떻게 일베의 여성 혐오가 가능하도록 만들었을까. 왜 이제야 발견했을까.(55)” “우리 모두가 결국 여성 혐오자이니 닥치고반성하자는 이야기를 하는 것이 아니다. 일베는 끊임없이 김치년을 엿보면서 쌓아 온 여성 혐오의 에너지를 이제 좌파와 민주주의에 대한 조롱으로 표출하고 있다. 그렇다면 그동안 한국 사회가 여성들을 적극적으로 타자화하고 특정 범주로 표상화하면서 해소하려고 하는 불안이 무엇인지 진지하게 성찰해야 한다.(56)”

그리고 또 하나의 질문이 있다. 진보진영에게 있어 일베라는 거울은 무엇을 비춰주는가. 우리가 혹시 우리가 가진 어떤 혐의를 일베에게 투사하고 일베를 처벌함으로써 그 혐의를 벗고자 하는 것은 아닌가. / 서둘러 일베를 루저 혹은 상종 못할 여성혐오자로 낙인찍고 봉합하려는 것은, 역설적으로 우리 사회가 일베라는 속죄양을 원한다는 뜻으로 읽히기에 반대한다.(56)”



*손희정, 혐오의 시대 2015, 혐오는 어떻게 문제적 정동이 되었는가, /성이론, 2015

 

필자가 예시로 든 세월호 텐트 앞 폭식투쟁, 개신교 우파의 동성애 혐오, IS에 가담한 김군과 뒤이은 김태훈의 “IS보다 위험한 무뇌아적 페미니스트칼럼 등에서 드러나듯, 이 논문에서 논하는 혐오는 개인적, 심리 내적 감정 차원의 문제가 아니라, “명백하게 정치적인 문제이다.(13)” “어떤 정동에 의해서 그 행위들이 조직되고 추동될 뿐만 아니라, 그렇게 비롯된 정치적 행위와 결과 및 그 정동 자체에 적대하기 위해서 또 따른 정치적 행위들이 조직되기 때문이다.(13)”

혐오가 개인과 공동체의 경계를 구성하고 견고하고 안전하게 유지함에 있어 어느 정도는 필수적인, 유구한 역사를 가지고 있는 정동(13-14)”이긴 하지만, 한국사회를 규정지을 만큼 특별히 두드러지게 된 것은 근래의 현상이다. 이에 필자는 인간의 존재와 문명을 조건 짓는 근본적인 정동 중 하나인 혐오가 지금 우리 시대에서 갖고 있는 시공간적 특수성에 대해 살펴보(14)”고자 한다. , “‘혐오는 어떻게 21세기 가장 문제적인 정동으로 등장하고, 어떻게 확대 재생산되며, 그 과정에서 왜 특정한 방향성을 따라 특정한 성격을 띠게 되는가. 그리고 과연 혐오를 어떻게 사유해야 할 것인가?’(14)”를 묻는 글이다.

특히, 반동적 복고주의에 경도되어 있는 혐오뿐 아니라 그에 대항하는 측에서도 내용은 공유하지 않되 형식은 공유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그것이 배제와 포함의 메커니즘인 혐오 자체가 지배적 정동으로 돌출되게 만드는 사회의 정치, 경제, 문화적 조건을 영속시키는 데 복무하는 것이 아닌(15)”지를 고민한다.

 

87년 체제와 외부 없음의 세계

필자는 당대적 혐오란 복잡한 맥락과 긴 역사를 가진 역사적 블록(그람시)’에 복무하는 것인지 모른다는 문제의식을 가지고, 1980년대 말에서 2010년대 중반까지의 한국사회를 탐색한다. 그 결과 87년 체제의 실패로부터 비롯된 것이라는 결론에 이른다. “혐오는 1987년 제도적 민주화 달성 이후 한국 사회의 정치경제적 실패와, 그 실패를 제도적 차원의 것이 아니라 개인적 차원의 것이자 자연인 것처럼 느끼게 하는 문화적 실패로부터 스스로를 비대하게 만드는 자양분을 얻어왔기 때문이다.(16)”

그렇다면 어떤 실패를 말하고 있는 것인가? 첫째로는, “87년의 민주화는 국가 구성원의 민주화에 대한 열망과 함께 자유화를 실현하고자 했던 자본의 욕망이 함께 작동(18)”했기 때문에 비롯된 실패이다. “87년 체제와 97년 체제를 구분하여 설명하면서 2010년대의 대한민국을 신자유주의화로 규정되는 97년 체제로 설명하고자 하는 입장은 민주화와 자유화를 엄격하게 분리하고자 하지만, 사실상 한국 사회에서 민주화와 자유화는 서로 분리된 과정이 아니라 복잡하게 착종된 상태로 이루어진 하나의 과정이었다(19)”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생명을 벼랑 끝으로 내모는 신자유주의 체제라는 자본주의의 실패와 그 생명을 구하는 것에 절대적으로 무능한 자유민주주의의 실패를 하나의 과정이자 하나의 실패로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19)”

둘째로는, 87년 민주화의 중요한 성과였던 합법적 정치적 공간의 확대가 가져온 양면적인 효과이다. 정치 공간의 합법화를 통해 놀라운 역사의 진보가 이루어짐과 동시에, 국가의 법이 게임의 룰을 강제하는 합법의 공간은 사회변혁 운동이 자유민주주의의 법칙으로 길들여지는 장소이기도 했던 것이다. “운동의 주체들은 합법적인 자와 그렇지 않은 자들로 분화되고 지배권력은 그 내부적 갈등을 통해 지배를 공고하게 했다. 여기에 여성을 포함한 성소수자, 외국인 노동자, 장애인 등 법 외부에 존재함으로써 법 내부를 결정하는 조건으로 기능했던 호모 사케르들의 투쟁은 시민권 획득을 통한 내부자 되기에 집중되게 되는 것이다. 더 많은 합법적 자유에의 요구는 자유민주주의에서 법의 힘을 확대하면서 동시에 그 내용을 더욱 복잡하게 세분화시켰다.(19-20)”

이런 과정 속에서 87년 체제는 낸시 프레이저가 설명하는 바대로의 탈사회주의적(postsocialist)’ 조건으로 이어지게 된다.(20)” 신자유주의라는 거대한 매트릭스가 바탕인 가운데, 대안적 질서에 대한 비전이 없고, 그걸 추구해 나갈 좌파 운동의 에너지와 상상력이 고갈되고 있는 것이다. 필자는 이를 두고 그야말로 자본주의-자유민주주의의 외부 없음의 세계(20)”라며, 이러한 세계에서 살아가는 개인들은 고립되고 파편화될 수밖에 없다고 본다.

 

공백의 등장

첫째로는 경제적 공백이다. “신자유주의의 가장 효율적인 통치성인 유동성(liquidity)’에의 추구가 개인들을 불안정한 삶으로 내몰고(21)” 있는 것이다. 마리아 미즈와 베로니카 벤홀트-톰젠이 말한 모든 생산력의 가정주부화(housewifisation)’, ‘유후 노동력이 그저 잉여로 처리된다는 바우만의 쓰레기개념 등. 경제적 주체로서의 자격이 박탈당한 채 불안한 삶의 조건 속에서 버티도록 내몰리는 것은 남성들의 실존적 삶과 정체성을 뒤흔들었다. 그들이 불안과 분노를 느끼게 되는 이유다.

둘째로는, 경제적 공백과 연결되어 있기도 한 정치적 공백이다. “먹고 사는 문제 자체에 봉착한 대중은 정치적 주체가 되고자 하는 의지는 물론이거니와 그렇게 되고자 하는 관심으로부터 소외되어 버린다는 점이다. ‘자유라는 환상에 포획된 열정적이지만 동시에 완전히 무기력한, 허무주의적인 주체가 되는 것이다.(22)” 87년 민주화를 성취하면서 제도적 민주주의의 실현을 향한 거대한 의지는 해소되었지만, 그 의지의 해소 끝에 민주주의는 전혀 작동하지 않고 있(24)”. “현실정치를 비롯하여 정치적인 것에 대한 허무주의적 태도와 혐오는 이런 조건 속에서 등장한다. 그리고 이는 다시 또 먹고사니즘외에는 아무것도 말할 수 없는 경제적이고 인식론적인 조건과 함께 진동한다.(24)”

 

혐오하는 스놉: 인정투쟁의 반동적 전유

스놉은 알렉산드로 코제브가 포스트-히스토리 시대에 등장하는 인간형으로 꼽았던 두 가지 존재양식 중 하나로, “주어진 환경을 부정할 실질적인 이유가 아무 것도 없음에도 불구하고 형식화된 가치에 입각해그것을 부정하는 행동양식을 뜻한다. 다른 한 존재양식인 동물과 달리 자연과 대립하긴 하지만, 그들의 대립은 역사적 발전을 추동하지 않는다는 점에서 역사 시대의 인간의 투쟁과는 변별된다.

필자는 이념의 시대, 운동의 시대, 민주화의 시대가 끝난 후 우리에게 열린 것은 문화적 스노비즘의 시대(25)”였다는 심보선의 논의를 차용하면서, 지금/여기의 스놉을 “IMF를 지나면서 경제적, 사회적, 생물학적 생존주의가 유일한 존재양식이 된 시대에 왜곡된 인정투쟁의 공간에서 살아남는 것에 몰두하는 인간형(25)”이라고 본다. 경제적, 정치적으로 주체가 될 수 없고, 사회적 구성원으로서 인정 받을 수 없을 때, 그렇다고 불안하고 불안정한 삶으로부터 피해 도망가거나 의지할 만한 관계조차 찾을 수 없을 때, 개인은 자신의 정체성을 확인하고 힘을 가진 자로부터 그것을 인정받기 위한 처절한 인정투쟁에 몰두하기 마련이다. 그 인정투쟁이 하필 반동적 복고주의의 내용과 형식으로부터 더 분명하게 가시화되기 시작한 이유는, 전통적 기득권들이 더 큰 박탈감을 느끼게 된다는 점, 강력한 소속감을 요청하는 전통적 공동체 감각이 기대기 쉬운 큰 줄기이자 거대한 매혹으로 다가온다는 점, CEO 정권 이후의 신보수주의 문화 정책과 전략의 영향 등을 꼽았다.

 

혐오의 ()발견, 그리고 수치심이라는 또 하나의 정동

실질적이거나 물질적으로 개인과 공동체에게 해를 끼치거나 위험한 존재라기보다는, 인식론적 차원에서 문화적, 사회적으로 위험한 것, 불쾌한 것, 제거되어야 할 불순물로 여겨지는 것들이 혐오의 대상이 된다. 그렇다면 우리는 혐오가 이 시대를 살아가고 있는 주체들에게 등장하게 된 거대한 공백의 문제, 불안정한 정체성과 기댈 수 있는 공고한 공동체적 감각의 상실과 관계되어 있는 정동이라고 볼 수 있지 않을까? , 혐오란 냉전 시대의 반공주의나 산업화 시대의 발전주의가 선보였던 것과 같은 강력하고 절대적인 적대가 제거된 시대에 어떤 집단적 정체성(31)을 견고하게 유지하기 위해서 등장하게 되는 타자화의 정동인 셈이며, 매우 적극적인 주체화의 열정을 반영하고 있는 정동인 셈이다. 왜 바로 이 시대에 혐오여야 하는가는 다양한 역사적 계기들의 상관적 관계 속에서 아주 우연적이면서도 필연적으로 등장하게 된 셈이다.(32)”

이때, 혐오를 만들어내는 이들이 자신을 동일시하고 있는 대상이 한국사회의 주류 혹은 기득권이기 때문에, 사회적 소수자가 혐오의 대상이 되는 것은 자연스럽다. 그런데 흥미로운 점은, 일베의 혐오가 무임승차에 대한 분노를 중심으로 구성되어 있음에도, “사실 혐오에는 나도 저렇게 될 수 있다라는 불안감 역시 작동하고 있다(32)”는 점이다. 출구가 전혀 보이지 않는 막다른 골목에 몰렸을 때, 우리는 나에게 기본적으로 장착되어 있는 저열함이나 불가능성을 나로부터 떼어내 비체(abject)화시켜 혐오함으로써 그 상황을 견뎌낼 안전막을 친다는 것이다. 따라서 그들의 혐오는 그들이 지금까지 얼마나 열악한 상황에 놓여있었는가의 반증이기도 하며, 실체 없는 환상과 이미지에 근거한 것이다.

 

수치심과 혐오의 반동적 문화 실천, ‘조리돌립(shaming)’

필자는 우리 시대 혐오 정동의 기반에 변화하는 미디어 환경이라는 하드웨어적 토대가 존재하며, 이것이 소비 자본주의의 극단에서 발생하는 주목 경쟁이라는 경제적이고 문화적인 차원으로 연결된다고 보았다. 그리고 이와 같은 주목 경쟁이 배타적인 정체성 담론에 의해 반동적으로 전유된 인정투쟁과 만나 등장하게 된 폭력적인 문화적 실천이 바로 스놉의 인터넷 문화라고 할 수 있는 조리돌림(shaming)’(34)”이라고 말한다. 혐오발화의 효과는 수치심과 만나며 한층 강력해지고, 그것은 다시 자신들이 주목 경제에서 이익을 얻기 쉽게끔 하기 때문이다. 이는 배타적인 공동체성을 구축하고 그 공동체의 내부 규범을 강화시킨다.

이 지점에서는 우리스스로에 대한 성찰도 필요하다. 개신교 우파와 일베뿐만 아니라, 트위터와 같은 SNS 공간에서 벌어지는 조리돌림역시 내용만 다를 뿐 형식은 마찬가지이기 때문이다. “어떤 신념을 가지고 있는가와 무관하게, 그 신념을 강화하고 지키려는 움직임이 반동적 복고주의를 지향하는 폭력적인 문화적 실천과 그 형식 및 정동의 구조를 공유하고 있다면, 과연 우리의 신념은 지향해야 할 바로서의 변화를 추동할 수 있을까?(37)”

 

우리가 근본적으로 적대할 것은 기실 구체적인 개인이라기보다는 지배적인 정동과 그 정동을 추동하는 구조적인 조건들일 터다. / 그런 의미에서 우리는 또 하나의 과제와 대면하게 된다. 혐오를 추동하는 강력한 인식론적 지평이었던 정체성 담론을 어떻게 넘어설 것인가? (...) 페미니즘의 급진화가 정체성의 정치학을 넘어서야 하는 이유는 혐오에 대한 분석 안에서 그 단초를 찾아볼 수 있다.(40)”

 

 

*손희정, 혐오와 절합하고 경합하는 정동들 : 정동의 인클로저를 넘어서 혐오에 대해 사유하기, 여성문학연구, 2015

 

혐오는 이미지로 매개되는 권력 관계이며, 이는 현실세계에서 배제와 억압, 폭력이라는 명백한 실효를 가지고 있다는 점에서 진지한 적대의 대상이 되어야 한다. (...) 그러나 과연 혐오란 무엇일까? 한 시대를 포착하고 규정할 수 있는 정동이라고 말해지는 혐오는 어떻게 변별되고 규정될 수 있을까?(118)”

필자가 보기에 현재의 지배적인 상상력은, 픽사 애니메이션 <인사이드아웃>(2015)에서 드러나듯이, 각각의 정동이 서로 명확하게 구분될 수 있다는 것이다. 하지만 정말로 정동들은 서로 명확하게 구분되는 것일까? 오히려 정동은 에너지와도 같이 끊임없이 흐르면서 섞임과 중첩 안에서 복잡하게 작동하는 변별 불가능한 과정 아닐까. 정동이 변별 가능하고 또 구획 가능하다는 공간적 상상력은 의심 없이 받아들여도 괜찮은 것일까.(119)” 이러한 문제의식의 연장선 상에서 정동을 변별 가능한 것으로 논하는 지배적인 인식론이 자본주의 사회에서 수행하는 역할과 현실적인 효과를 논하고, 보다 구체적으로 혐오에 관해 탐구하는 글이다.

 

정동의 관리와 인클로저

필자는 정동을 구획할 수 있다는 지배적인 생각과 이를 통해 가능해지는 정동의 관리과정을 정동의 인클로저라고 명명한다. “자본주의 초창기 공유지에 테두리를 쳤던 인클로저 운동이 토지 점유를 통해 행사했던 효과와 마찬가지로, 인간들 사이의 감정적 공유지를 해체하고 원자화된 개인을 자연적인 것로 인식하게 만드는 효과를 가져오고(121)” “1960년대 말 경제 성장률 저하와 자본주의 위기를 타계하기 위한 새로운 시초축적의 한 요소로 활용되었(121)”기 때문이다. 우리 시대의 혐오 역시, IMF 이후 닥쳐 온 새로운 시초축적 과정 안에서 등장한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고 본다.

뒤따라 등장하는 질문은, “우리 시대를 혐오의 시대로 규정하고 혐오를 독립적이고 자율적인 정동으로 다루는 어떤 논의들이 이런 정동의 인클로저에 동참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122)”하는 것이다. 필자는 정동의 인클로저에 동참하지 않는 방식으로 혐오를 다루기 위해서 혐오를 정동 자체가 아니라 일종의 비평적 개념으로 축소시켜 다루겠다고 한다. 혐오를 실제적인 행위와 상호작용하면서 물질성을 띄게 된 정동으로서, 다양한 정동들의 복합체로서 이해하고 사용해야 한다는 것이다.

 

혐오의 계열

필자가 혐오의 시대 2015, 혐오는 어떻게 문제적 정동이 되었는가에서 말했던 바와 같이, 우리 시대에는 혐오하는 스놉이 등장했으며, 이들의 실천양식 중 하나로 조리돌림(shaming)’을 들 수 있다. 조리돌림은 혐오와 수치의 관계를 보여준다.

그에 이어, 이 글이 말하는 혐오의 두 번째 계열은 행복 산업과 한없이 투명한 재미이다. 한병철은 정보혁명 이후 우리 시대를 투명사회라고 규정했다. 정보의 자유라는 맥락에서 투명성이 강력히 요구되고 상당부분 받아들여지지만, 결국은 이것이 통제사회로 연결된다는 것이다. 여기서 출현하는 긍정사회다름과 낯섦, 차이, 타자의 저항, 거리(혹은 간격) 등 사유와 비평, 토론, 진리에의 탐구를 조직하는 부정성negativity의 소멸(133)”을 의미하는 긍정성을 추구하며, “단순한 것, 즉각적인 것, 명명백백한 것, 벌거벗겨진 채로 노출되어 버린 것, 그러니까 포로노적인 것들이 주목을 획득하며 따라서 가치를 가지게(133)” 되는 곳이다. 이런 곳에서는 사유의 간극을 필요로 하지 않고 바로 공유 가능한 소수자와 타자에 대한 비하가 드립떡밥이 되어 웃음거리를 제공하고, 이에 대항하는 사람들은 설명충’, ‘진지충이 된다는 것이다.

재미의 성격뿐 아니라 재미 자체의 문제도 살펴볼 필요가 있다. 필자는 재미와 혐오는 서로가 서로를 상관적으로 구성해 왔(135)”던 만큼, “‘재미의 가치는 어째서 이처럼 무소불위의 힘을 가지게 되었을까(135)”도 물어야 한다고 말한다. 이에 대한 답은, 자본이 자신의 이익을 위해 노골적으로 행복과 명랑함을 지상과제로 추구하기 때문에 행복이 최고의 이데올로기가 되었다는 것이다. 따라서 행복이 그토록 강조됨에도 불구하고, 이 시대의 행복이야말로 가장 연약한 감정이다. 신자유주의 체제가 양산한 무한경쟁각자도생의 삶의 조건에서 행복 지상주의가 나타난 것이라면, 끊임없는 비교와 경쟁은 피할 수 없는 피로와 우울을 우리에게 가져다 줄 것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에 대한 좌절이나 반대항으로 등장하여 지배하는 정동은 바로 허무와 냉소, 그리고 명랑한 체념일 것이다.(137)”

 

하나의 정동에서 가능성을 찾으려 하는 논의들은 긍정적 정동과 부정적 정동에 대해서 논의하는 태도를 견지하곤 한다. 예컨대 혐오와 수치심은 부정적이고 애도와 분노는 긍정적일 수 있다는 식의 상상력을 바탕으로 하는 것이다. 기실 본 논문 역시 그런 논의 자체로부터 자유롭지 못하다. (...) 그러나 우리가 예민하게 인식하고 인정해야 할 것은 어떤 특정한 정동의 부정성과 긍정성은 특정한 동기안에서만 말해질 수 있다는 점이다. 정동 자체의 부정성과 긍정성을 이야기하는 것보다 중요한 것은 그 정동들과 연결된 행위의 효과들을 탐구하는 일이다. 따라서 우리는 정동에 대한 논의를 정동 그 자체보다는 그를 둘러싼 다양한 네트워크로 확장시켜야 한다.(13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