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평/기타

[드라마] 도망치는 건 부끄럽지만 도움이 된다(영어제목: I got married as a job) - 가사노동에 대한 유쾌한 사고실험

Utopian 2018. 3. 26. 23:24

유쾌한 드라마였다. 고학력임에도 불안정고용과 위계적 조직문화로 소진되어 가기만 했던 미쿠리가 우연히 하게 된 하라마사의 가사대행에서 성취감을 느끼게 되고, 여차저차해서 입주형 전업가사대행이 되기 위해 외형만 부부의 모습을 갖추는 것은, 부유한 남자와 결혼하여 가정주부가 되는것을 ‘취집’이라며 비난하는 세태를 멋지게 뒤틀어낸 데가 있었다. 가정주부로 취업하는 게 뭐가 나빠, 가사노동도 시간과 노력뿐 아니라 숙련도와 전문성이 요청되는 엄연한 ‘노동’인데다가 상당한 경제적 가치를 지니는 것인데, 내추럴 본 공대생 하라마사가 계산기 두드려본 결과 급료를 주어가면서라도 이 고용계약 하는 편이 자기한테도 유익하달 정도인걸, 하고.


하지만 거기까지였다면 가사노동에 관한 반쪽짜리 통찰이었을 것이다. 작품 속의 미쿠리가 고용주인 하라마사와의 관계에서 당연하게 아랫사람의 위치를 점하고 있단 점에서 알 수 있듯이, 가사노동이 노동시장에서의 생산노동을 경유해야만 화폐로 환산될 수 있다는 사실로부터 발생되는 권력낙차는 다루지 않는 것이 되기 때문이다. 게다가 이미 홑벌이만으로 생계가 해결되지 않는 가구가 태반인 시대상황은, 가사노동의 가치 재평가 외에 전업주부 모델을 대체할 대안적 모델의 구상 또한 요청하고 있다. 


드라마의 후반부는 하라마사가 정리해고되고 임금이 훨씬 적은 회사로 옮기게 되면서, 그간 확실한 역할분담으로 평화로울 수 있었던 일상이 삐꺽거리기 시작하는 것을 담고 있다. 회차가 진행될수록 고용관계로 시작했던 둘은 - 모두가 예상할 수 있듯이 - 금새 꽁냥대다 연애 국면으로 들어서게 됐기 때문에, 미쿠리를 해고하지 않고 가정을 공동경영하자며 미쿠리는 파트타임 일이라도 찾아보고, 하라마사는 가사일을 분담하기로 한다. 그러나 노동시장에서 미쿠리의 시간당 페이가 높지 않은 탓에 이전과 같은 소득을 확보하기 위해 두 사람이 일해야 하는 총 시간은 길어지게 되었고, ‘분담’의 경계선은 모호하다. 자연스레 지친 하루의 끝에 할일을 서로에게 미뤄버리거나 지저분해진 집안꼴에 한마디씩 얹게 되기 마련이었고, 크고작은 갈등들이 쌓이기 시작한다.




이렇듯 처음에 상큼하고 기상천외한 설정(I got married as a job!)으로 시작했던 드라마는 점차 많은 맞벌이 가구가 일상적으로 겪는 평범한 문제상황으로 우리를 끌고 간다. 그 타이밍에 하라마사가 고안한 돌파구는 진짜 결혼을 하자는 것. 이에 대해 미쿠리가 “애정의 착취”라며 반박하는 대목은 마치 이것이 가상의 드라마에서나 가능할 특이한 이 커플에게만(화요일에 포옹하자고 제안하고 재활용쓰레기 버리는 날이라 기억하기 좋다며 기뻐하는 커플?) 적용되는 이슈가 아니라고, 모든 ‘보통의’ 결혼에 내재한 문제가 아니냐고 묻는 듯하다. 이 질문을 고민하는 것은 시청자인 우리들의 몫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