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시]삶의 아름다움에 대하여: 프리다 칼로 <생명의 꽃>
좌: 프리다 칼로 <생명의 꽃> (1944) / 우: '생명'의 전형적인 이미지
생명은 푸르고 빛나며 삶은 아름다운 것이라고 누가 정했던가. '생명'이라 하면 떠오르는 전형적인 이미지들-새로운 것, 푸른 것, 여린 것, 환하고 빛나는 것, 그리하여 모든것을 집어삼키는 포악스럽고 무시무시한 죽음의 무질서와는 대비되는 것-과 달리, 프리다 칼로의 <생명의 꽃>은 갓 적출한 나팔관과 아열대의 식충식물을 연성해놓은 듯한 모습이다. 이 괴기스러운 이미지로 생명을 표상하면서, 그녀는 삶의 아름다움에 심취해있는 예찬론자들과 분명한 거리를 둔다. 오히려 그녀는 그린다: 고통으로 가득한 열대우림 속에서 붉게 꿈틀거리며 연명하기 위해 매순간 발버둥쳐야 하는 것이 삶이다, 라고. 적어도 나의 삶은 그러했다, 고.
좌: 프리다 칼로 <몇개의 작은 상처들(a few small nips)> (1935) / 우: 프리다 칼로 <부러진 기둥(the broken column)> (1944)
그녀의 그림은 고통을 숨기지 않는다. 삶은 미화되어야 할 것이 아니므로. 그러나 과장하거나 호들갑떨지도 않는다. 그럴만한 일도 못되므로. 나체로 자상을 몇군데나 입고 붉은 피를 흘리며 누워있는 여성의 그림, 그림 밖 액자에까지 붉은 물감이 말라붙은 피처럼 엉겨있는 이 그림에 그녀가 붙인 제목은 '몇개의 작은 상처들(A few small nips)'이다. 칼이, 상처가, 피가 끔찍한가. 아동기의 소아마비, 18세때의 대형 교통사고, 거듭된 수술, 세 번의 유산, 사랑하는 이의 외도, 결국에 절단해낸 발, 한순간도 끊이지 않고 온몸을 관통하는 격통... 생이 이러한데. '작은' 상처라는 작명은 비유법이나 과장법이 아니다. 낭만적 베일을 찢어낸 하이퍼리얼리즘에 가깝다. 실제로 그녀는 자신을 초현실주의자로 분류하는 것에 맞서며 "나는 결코 꿈을 그리는 것이 아니다. 나는 나의 현실을 그린다"고 하였다.
아마도 가장 많이 알려져있을 대표작인 <부러진 기둥>에서도 그녀는 고통을 애써 숨기거나 숭고한 것으로 포장하려 하지 않고 그대로 노출시킨다. 그녀의 척추를 대신한 쇠기둥에는 금이 엉망진창으로 가 있고, 온몸에 못이 박혀 있으며, 배경은 황량하다. 눈에선 눈물이 흐른다. 보기만 해도 폐부가 후벼파지는 듯한 아픔을 선사하는 묘사이다. 그러나 그림 속 그녀의 표정은 고통으로 일그러져 있거나 소리 지르고 있지 않다. 오히려 담담하다. 그렇다고 생명력 없는 체념의 모습도 아니다. "나는 이 외출이 즐겁기를 바란다. 그리고 나는 다시는 돌아오지 않기를 바란다. (I hope this exit is joyful, and I hope never to return.)" 그녀가 죽기 직전에 일기장에 남긴 말이다. 다시 살고 싶지 않을만큼 괴로웠던 삶, 분명 그랬을 텐데도. 그녀의 자화상 속 인물들-프리다 칼로 자신-은 모두 치열한 정면응시. 절망의 밑바닥까지도 직면하는 용기를, 그럼에도 회의주의에 빠지지 않는 강인함을, 그녀는 가지고 있었다.
삶은 결코 장밋빛이 아니다. 그러나 나는 그녀의 치열함을, 강인함을, 고통에의 맞부딪힘을, 이 경이로운 생을 부를 다른 말을 찾지 못해 다시금 '아름답다'고 할 수밖에 없을 것 같다. 세상에 아름다운 것이 있다면 이러한 삶의 방식이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