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형 변화
이쯤 되면 강남역 살인사건이 진짜로 혐오범죄인지 여부를 논하는 것은 큰 의미가 없어보인다.
수많은 사람들이 이를 여성살해(femicide)라 느끼며 추모와 분노를 표했고, 자신의 폭력 피해경험을 발화했고, 젠더 권력구조에 대해 말했다. 논의는 여성혐오(misogyny), 메갈리아, 페미니즘 운동, 남성혐오의 존부, 심지어는 감정표출과 논리적 토론이 배치되는 것인지 여부에 이르기까지 확장되었다.
여성혐오, 성차별, 젠더 폭력은 2016년 5월 17일 새벽1시에 갑자기 등장한 독특한 현상이 아니다. 지금까지 계속해서 많은 여성들이 여성이라는 이유로 맞고 죽어왔다. 강남역 살인사건의 특기할 만한 점은 오히려 사건 이후의 반응에 있다.
기존의 여성운동은 여성단체나 소수의 페미니즘 운동가들이 주도하는 방식으로 이루어져왔다. 이들이 의제를 던지고 이벤트를 기획하는 등 판을 짜면, 관심 있는 사람들이 참여하는 경우가 많았다. 그러나 강남역 살인사건의 추모, 자유발언대, 잇다른 공동행동 등은 자발적이고 자생적인 방식으로 진행되었다. '강남역 10번 출구'라는 페이스북 페이지가 만들어지고, 다양한 아이디어가 쏟아지고, 자원한 사람들이 이를 실행하는 과정에 주도하는 운동가/참여하는 시민의 구분은 없었다.
이는 가히 페미니즘적 지형 변화라고 부를 만한 것이다. 적어도 한국의 젊은 층은 준비된 청중, 혹은 더 나아가 자발적 운동주체가 되었다. 과거에는 열의 없는 이들을 설득하고 조직하는 것이 중요한 임무였다면, 현재 요구되는 것은 올바르고 매력적인 전망의 제시이다.
살인남의 주관적 세계 안에서 정신분열증과 여성에 대한 증오의 지분을 따지는 건 이제 매우 부차적인 문제다. 현재 이슈화된 쟁점들, 논의의 지형들, (페미니즘을 이론적으로 공부하지 않은 사람들 사이에서조차)범람 중인 다양한 개념들에 주목해야 한다. 그리고 지금의 엄청난 열기에 어떤 방향을 부여하고 싶은 것인지를 고민해야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