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지] 피억압자의 말로 피억압자를 공격하기: <제국의 위안부> 비판
박유하의 <제국의 위안부>가 논란의 중심에 있을 때에 나는 해당 책이 직접 증언연구를 한 바도 없으면서, 명백하게 자의적인 방식으로 기존의 증언들을 짜깁기하고, 논리적 비약이 많다는 점을 확인하고는 흥미를 잃었다. 굳이 반박을 할 가치가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내가 본 박유하는 (아래 글의 표현에 따르자면)'순진한 실증주의자'도 못 되었으므로. 단지, 이 책을 둘러싼 논쟁을 지켜보면서 그동안 일본군 '위안부' 문제를 민족주의적 시각이 아닌 방식으로 바라보고자 했던 많은 시도들이 여전히 대중들에게는 전달되지 못했단 것을 깊이 자각했을 뿐이었다.
그 게으른 마음가짐을 부끄러워지게 만드는 글이다.
**글 전문을 보려면: http://anotherworld.kr/306
(사진: 최초의 증언자, 故김학순)
피억압자의 말로 피억압자를 공격하기: <제국의 위안부> 비판
"그러나 이 책의 가장 심각하고 가장 근본적인 문제는 서브알턴의 경험과 언어를 찬탈하여 서브알턴 자신의 발화와 투쟁을 부당하고 비합리적이고 거짓된 것으로 매도하는 데 역으로 이용하고 있다는 점이다. 감히 말하건대, 이것은 지식인이 지식 권력을 사용해 서브알턴에게 저지를 수 있는 가장 끔찍한 폭력이다."
"다시 한 번 노예제도에 비유를 해보자면, 흑인 노예와 백인 노예주 사이도 전적으로 적대적이기만 하지는 않았다. 특히 유모나 하인 등의 가내 노예는 노예주와 유사 가족적 관계를 형성하고 제법 온정적인 대우를 받는 경우도 많았다. 극소수의 운 좋은 노예들은 심지어 백인 주인 밑에서 돈을 벌어 부자가 되기도 했다. 그렇다고 ‘피해자로서의 흑인이라는 정체성에 균열을 일으킨다’는 명분으로 노예제를 미화하거나 이러한 기억들을 재조명함으로써 인종 간의 화해를 도모하자고 주장하는 사람은 없다.
박유하가 이런 헛소리를 할 수 있는 까닭은 노예제도와 달리 여성에 대한 성적 폭력과 억압은 여전히 진행 중이고, 여전히 은폐되고 있으며, 여전히 부정당하고 있기 때문이다. 노예가 주인에게 저항하지 않았거나 적극적으로 충성했다고 노예를 노예가 아니라고 말하는 사람은 없다. 그러나 강간 피해 여성은 극렬하게 저항하지 않거나 가해자에게 우호적인 반응을 보이면 강간 경험이 연애의 일종으로 취급받는 끔찍한 처지에 놓이게 된다. 이른바 ‘화간’이라는 이름으로 말이다. 강간당한 뒤에 가해자에게 무언가를 받으면 대가를 받았으니 성매매가 된다. 피해자의 순응이, 가해자의 온정이, 강간에서만큼은 아직도 가피해를 흐리고 화해를 설파할 근거가 된다."
"그것은 우리에게는 악몽이지만, 지배집단에게는 영원한 열망이다. 사회적 지위와 특권을 유지하고 약자에게 시혜를 베푸는 주체로서 도덕적 우위도 누리고 해석하고 발언할 수 있는 권력도 계속 독점하고 싶은 지식인에게도 마찬가지고. ‘거대서사의 해체를 통한 미시서사의 해방’이라는 서사는, 그것이 ‘누구를 위한 누구의 서사인가’를 먼저 묻지 않으면 그들의 훌륭한 도구가 된다. <제국의 위안부> 현상이 보여주는 핵심적인 교훈은 거기에 있다."